12. 무리한 중화학 투자로 기업 도산 속출(2차 오일파동)
1979년 2월, 이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새로 집권한 호메이니 정부는 혁명 직전 미국으로 탈출한 팔레비의 송환을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가 거절하자 서방국가 석유수출 전면금지 조치를 내린다. 세계 석유 공급량의 15%를 차지하는 이란의 석유수출 금지조치로 인해 다시한번 석유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 사건을 '2차 오일쇼크'라고 한다.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자 한국은 72년 부터 추진해오던 중화학 공업 중심의 3차 경제개발계획이 발목을 잡히면서 엄청난 공황 상태에 직면하였다.
1배럴에 12달러 하던 유가가 36달러까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직전의 상태에 직면했다. 이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하여 (IMF때도 50%에는 이르지 않았음) 기업들이 줄도산하였고,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 했다.
이때 살아남은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끌어들인 자금을 갚기 위해 필사적.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의 연속이 계속되었으며,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시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 1979년말 180억달러(당시 원화가치 8조7천억원)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달러(당시 원화가치 44조 5천억원) 수준으로 급증하였다. (참고로 85년도 수출액은 300억달러 수준이었으며, 한 해 국가 예산은 12조였다.) IMF의 근본적인 원인이 사실상 박정희, 전두환 두 정권의 무리한 중공업 투자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가 사망한 직후인 1980년 초반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나 다름없었는데, 80년도 경제성장률은 -2.1%였으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이르렀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안겨준 선물이었다. 경상수지는 53억 1200만 달러라는 대규모 적자를 냈으며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그나마 한국 경기에 다행이라면 80년대 세계사를 휩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결과로 인한 저유가 시대 도래와 '플라자 협상'에 따른 저환율 시대의 도래로 기업 생산성이 좋아져 가까스로 국가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결된 88년 이후 국제원자재 가격상승 등 대외적 여건이 변화한데다 3저호황기(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시대)에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이 생산적 투자가 아닌 부동산 및 주식투기로 집중되는 대내적 요인으로 인해 수출경쟁력이 급속도로 둔화되면서 수출이 침체되고 적자수출을 재현하는 등 한국 경제는 침체를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