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이념이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
더 중요한 문제는 검찰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김일성만이 쓴 것처럼 규정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따른 것을 종북으로 몰고 있는 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을 종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된 것으로 몰고 가는 행위는 그야말로 우리 헌법의 역사성을 짓밟는 반 헌법적 행위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가장 먼저 나오는 문건은 김규식, 여운형 등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1920년 간행한 <신한청년>을 꼽을 수 있다. 이 잡지는 3ㆍ1운동에 대하여 “유럽전쟁을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격랑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유와 행복을 위해 총궐기하게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2년 12월 29일 태평양전쟁 발발 1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는 “그때(3 · 1운동) 이후 우리는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이상을 가지고 혁명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그것이 현재의 중경임시정부이다”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우리는 한국이 국가적 독립을 회복할 수 있으며 현대의 요구에 적합한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지배를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인 동시에 한국건국의 중심사상과 최고원칙이었다. 이보다 앞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뒤에 광복군 사령관 대리를 지낸 황학수 장군은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광복> 제1권 제2기 (1941년 3월 20일)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출현할 신흥의 한국은 현대 자본주의 세계와 같은 수탈적인 경제제도를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새로운 국가는 “20세기 진보적 신형 민주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좌우연합정부인 임시정부에서 제2당으로 좌파진영을 대표했던 조선민족혁명당은 창립 9주년 기념사(1944년 7월)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강령이 건설하고자 하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민주주의적 국가이다. 단, 이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는 영미식 부르주아 국가가 아니고 사적 자본의 극단적인 발전을 제한하고 부르조아 독재를 반대하며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극력 보호하는 가장 새롭고 가장 진보적인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천명했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이 헌법인 ‘임시헌장’을 개정하면서 채택한 선언(“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6차 임시의회선언”)은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 집권제 원칙의 채용을 주안으로 삼고 이전 임시약헌을 많이 고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언은 “우리 민족 장래의 신민주국가 건설이상에 더 잘 적합하게 되었다”면서 “민족독립과 민주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국내의 혁명전사 및 전체 동포들! 다같이 이 전민족 행동의 최고 준칙인 임시헌장을 옹호하고 준수하자!”라고 호소했다. 해방 전에 맞은 마지막 임시정부 창립 기념일인 1945년 4월 11일에 열린 제38회 의회에서 좌파인 조선민족해방동맹 소속 김규광(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 = 김성숙)은 26년전에 처음 제정된 임시정부 헌법을 설명하면서 “진보된 민주주의를 우리는 벌써 접수하여 온 것”이라며 “역차 운동이 다 우수한 진보적인 민주주의 기초 위에서 된 것”이라며 “임시의정원과 정부가 다 그(진보적) 민주주의 사상 기초 위에서 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조선일보도 동아일보도 김성수도 맥아더도
이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의정원과 정부 그리고 헌법이 모두 진보적 민주주의 사상위에 성립된 것이다. 그 내용은 1941년의 건국강령과 1944년의 임시헌장을 거쳐 1948년의 대한민국 제헌헌법으로 계승되었다. 유진오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헌헌법에 대한 제안설명과 제헌헌법에 대한 해설서인 <헌법해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ㆍ사회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제헌헌법의 기본정신이라고 한 것은 바로 임시정부의 진보적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에도 계승되었음을 의미한다. 수탈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제헌헌법의 아버지들이 추구한 것은 19세기의 고전적인 영ㆍ미식 자유민주주의는 아니었다. 유진오가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하기는 하였으나”라면서 “일면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장점인 각인의 자유와 평등 및 창의의 가치를 존중하여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일견 대립되는 두 주의가 한층 높은 단계에서 조화되고 융합되는 새로운 국가형태를 실현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영ㆍ미식 자유민주주의(즉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균등한 국민생활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내용으로 하는 임시정부 이래의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이 대한민국을 재건할 때 국민들에게 한 숭고한 약속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2차 대전 기간 중과 종전 직후에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말로써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진영에서도 한동안 널리 쓰인 말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 관한 찬성과 반대의 문제를 거치면서 좌익과 우익이 각각 자기 진영을 추스릴 때, 좌익이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하려 하자 <동아일보>(1946년 2월 8일자)는 비상국민회의가 “진보적 민주주의 양심과 실천으로써 출발”하였음에도 이에 대립하여 좌익만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을 비판했다. 또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8일자 사설에서도 우리민족이 “확고부동한 민족의식을 가진 민족단일체”라는 사실만 건국이념으로 확립한다면 “계급적 대립 문제 기타 사회문제는 진보적 민주주의원칙에 의한 국가의 사회경제정책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도 1946년 6월 20일자 사설에서 “민족통일의 견고한 역사적 사명”을 확고히 한다면 조선의 정치노선은 “세계적 정치대세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목표로 보조를 같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민당의 지도자 김성수도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의 통치를 “진보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찬양하면서 미육군성인 하지 장군의 유임을 요청하기도 했다. (<서울신문> 1946년 10월 9일) <조선일보> <동아일보>나 김성수 뿐 아니라 맥아더 장군도 일본에서의 자신의 통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평가하기도 했다. 맥아더는 파뉴슈킨 주미소련대사가 맥아더 사령부의 대일 점령 정책이 일본의 경제적 파멸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난하자 그가 “일본에서의 진보적민주주의의 조류를 소련식 독재적 전체주의 이념으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고 받아쳤다.(<동아일보> 1949년 7월 17일자)
역사와 책임 (한홍구 역사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