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가 만든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교육부는 법에도 없는 재검정 절차를 거쳐 지난 10일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최종 승인했지만 오·탈자를 비롯해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편향적 서술이 여전히 많은 것으로 드러나 교과서로는 부적합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교육부가 재검정을 맡긴 수정심의회 위원명단을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 '부실검정' 논란에 이어 '밀실검정' 의혹이 깊어지고 있다.
국회 교육문화관광위 소속 의원들과 역사학계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교학사 교과서가 안고 있는 오류는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명백한 오류라고 밝혀진 내용마저 재수정에 반영되지 않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특히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오류의 대부분이 근·현대사 부분에 집중돼 있어, 출판사가 특정 정치세력의 눈치를 살피며 수정을 기피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마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교학사 교과서의 대표적인 오류들을 모아보았다.
사실관계 오류
▲ 260쪽. '제2차 조선교육령'을 소개하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학원칙"이라고 서술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제는 한국인에게는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고등여자보통학교' 코스를 강요한 반면, 일본인에게는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코스를 마련해 교육에서도 '민족 분리정책'을 실시했다. 이를 제대로 서술하려면 최소한 '민족 분리교육' 또는 '교육 이원화정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 304쪽. 미·소공동위원회를 소개하며 "결국 10월에 소련대표단이 평양으로 철수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고 서술했지만 역사4단체가 작성한 검토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소련대표단이 철수하기 전 미국이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함으로써 사실상 미·소공동위가 무력화됐다. 교학사 교과서는 사안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왜곡해 미·소공동위 결렬이 마치 소련대표단의 철수 때문인 것처럼 서술했다.
▲ 256쪽. 이승만에 대해 설명하면서 "임시정부는…미국의 워싱턴에는 구미위원회(대표 이승만)를 두고 필라델피아에는 한국통신부(대표 서재필) 등을 두어…"라고 서술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를 정식으로 설치한 적이 없을 뿐더러, 구미위원부의 첫 대표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규식이다.
▲ 315쪽. '더 알아보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그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압력이기도 했다"고 써 놓았지만 앞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반공포로 석방 전에 이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이 대통령에게도 통보했다.
▲ 324쪽. 5.16 군사정변을 "5.16 군사정변은…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했다"고 서술했지만, 사실은 미8군 사령관과 주한미국대사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367쪽. '재일교포의 북송'을 설명하면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이라고 기술했지만 이 조약의 이름은 '재일 조선인의 귀환에 관한 협정'이다.
▲ 332쪽. 경제성장에 대해 설명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라고 쓴 것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잘못 쓴 것이다.
▲ 318쪽.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날을 "1954년 11월 17일"이라고 적었지만 실제 조약체결이 최종 확정된 날은 '11월 18일'이다.
▲ 315쪽. 반공포로 석방을 설명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의 숫자를 "17만여 명"이라고 적었지만 '13만여 명'을 잘못 적은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
▲ 46~47쪽. 이 교과서는 두 차례나 "신라하대에 유교정치 이념이 대두됐다"고 기술했지만 역사학계의 통설은 유교정치 이념이 자리잡은 시기를 7세기 신문왕 때로 보고 있다. 하일식 한국역사연구회장은 "이런 교과서로 공부해 시험을 치르면 오답"이라고 말했다.
▲ 5단원을 소개하면서 "세계 곳곳의 식민지 국가들에게 독립으로 가는 길도 제시됐다. 하나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근대적 실력양성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제시한 민족해방투쟁의 길이었다. 우리 민족도 대체로 이 두 가지 길을 따라…"라고 서술했지만, 이것 역시 역사학계의 일반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9년 베르사유체제에 의해 부정됐다. 그런데도 민족자결주의가 마치 세계사 흐름의 한 축인 것처럼 기술한 것은 무리"라면서 "지금까지 어떤 한국사 연구에서도 우리 민족운동을 민족자결주의의 길과 반제해방투쟁의 길로 분류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일본 관점에서 서술
▲ 240쪽. 항일 의병전쟁에 대해 설명하면서 "헌병경찰들은 의병 토벌과 독립운동가 체포는 물론…"이라고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이는 교육부도 '친일적 표현'이라는 이유로 수정을 명령한 것으로, 교학사는 수정명령을 받은 250쪽 '남한 대토벌작전' 부분만 따옴표로 처리했을 뿐, 240쪽 등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전히 "토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279쪽. 일제의 '쌀 수탈'을 '쌀 수출'이라고 표현해 마치 합법적이고 정당한 국제무역인 것처럼 호도했다. 도종환 의원(민주당)은 이에 대해 "수정된 교과서도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친일 교과서"라고 혹평했다.
▲ 203쪽. '일본의 대조선 외교전략' 단락에서 '을사조약'이라는 용어 대신 일제가 사용한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 351쪽. 동북아시아의 영토분쟁에 대해 설명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된 일본은 국력을 신장시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면서 "1922년에는 일본의 최남단 섬 오키노토리시마에 측량선을 보냈다"고 적었다. 그러나 '오키노토리시마'는 '섬'이 아니라 특정 국가의 영토가 될 수 없는 '암초'라는 것이 한국과 중국정부의 공식입장이다. 따라서 이를 '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일본의 영토라고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한·중·일 3국 정부는 이 암초를 놓고 UN 등지에서 수십 년 동안 팽팽히 맞서며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교학사가 일본정부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일본이 이 암초를 '섬'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이곳 인근해역까지 확대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민철 외교부 국제법규과 서기관은 "오키노토리시마는 UN 해양법 제121조 규정대로 인간이 살 수 없는 암석"이라면서 교학사 교과서가 정부의 주장과 상반된 내용을 실은 것을 아쉬워했다.
비교육적인 표현
▲ 190쪽. 을미사변을 설명하면서 문제가 됐던 명성황후 시해범의 회고록을 한국인이 쓴 <대한계년사>로 대체했다. 그런데 "왕후를 찾아내고는, 칼날로 찍어내려 그 자리에서 시해했다. …왕후의 시신에 석유를 끼얹고, 그 위에 땔나무를 쌓고서 불을 질러 태워버리니, 다만 몇 조각 해골만이 남았다"는 표현을 여과 없이 실었다.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 소장은 "일제의 야만성을 보여주려는 목적이라지만 끔찍한 살해장면을 이처럼 상세하게 묘사한 글을 교과서에 실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라면서 "학생의 감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표현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했다.
▲ 313쪽. 학도병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야기 자료로 제시한 '학도병 이우근'의 이야기를 여전히 삭제하지 않았다. 지난 10월 11일 정진후 의원(정의당)은 이 부분을 지칭해 "소년의 죽음을 전쟁영웅으로 미화한 일본 후쇼샤 교과서의 '특공대원 오가타 죠'를 그대로 빼닮은 내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오·탈자
▲ 203쪽. 을사조약에 대한 설명 가운데 "불법적으로 체결되으므로…"라는 기술은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므로"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 213쪽. 화폐개혁에 대한 설명 가운데 "모양과 질이 조합하여 화폐로 인정키 어려운…"이라는 기술은 "모양과 질이 조잡하여 화폐로 인정키 어려운…"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원장(연세대 교수)은 "엉터리 교과서의 근본적인 오류를 고치지 않으면 아무리 수정을 해도 교과서로 사용할 수 없다"면서 "일제 식민지배와 친일파·독재자를 미화하는 교과서를 청소년들에게 배우도록 한 것은 범죄행위다. 교육부장관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