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민주주의를 말하면 종북인가?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였다. 정부 측 견해에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 평양로동정치학교 연설에서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고, 통합진보당은 이를 추종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란 김일성만이 독점적, 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과연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 평양로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의 텍스트를 역사연구를 넘어 사법적 판단의 증거로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일성이 해방 후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평양시 민중대회에서였다. 이날 행한 김일성의 연설은 전문이 남아있지 않아 1949년판 <조선중앙연감>에 처음 실릴 때 200자 원고지 두 장 분량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수만 명이 들은 공개연설도 제대로 기록이 되지 않았는데 이보다 앞서 김일성이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평양로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이 제대로 기록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평양로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은 1980년에 나온 백과사전에 갑자기 등장한 뒤, 1990년대 간행된 <김일성 전집> 등에 ‘전문’이 실렸다. 형사 사건의 자백에도 ‘자백성립의 진정성’을 따져야하고, 재판의 증거법칙에도 독수독과론이 있고, 자연과학의 실험실에서 오염된 시료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북정권은 남아있지도 않은 김일성의 연설문을 수십 년 후에 ‘원문 그대로’ 복원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는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그대로 믿고 김일성이 연설을 했고 통합진보당 강령이 이 연설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에 필자가 심사하는 석ㆍ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연설문을 중요한 역사자료로 활용하여 논지를 전개했다면 나는 절대로 그 논문을 통과시켜주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와 책임 (한홍구 역사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