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위에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그는 더 이상 지배계급에 속하지 않으며, 이 지배계급이 "고용"을 결정함으로써, "자기 계급의 본질 내에" 전문가가 위치하도록 지시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나름 알려진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일본 교토에서 한 그의 강연을 묶은 책이 바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식인의 본래적 역할(피 지배 계급을 대변하는..)을 강조하며 그것과 분리되는 전문가라고 불리는 지식인을 비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비판하고 있다.
지배 계급은 첫째, 자기들이 적당하다고 판단한 이데올로기와(초등, 중등학교에서), 둘째, 사람들이 자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줄 지식과 경험을 (대학에서) 그들에게 공급해 줄 수 있도록 교육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람시를 인용하며..
"상부구조의 관리"가 되게 한다.
나는 안철수의 행보를 보며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에 대한 규정이 머리 속에 계속 맴돌고 있었는데... 그의 출현으로 탈 정치화 된 목소리와 '전문가 정치'에 대한 열망이라는 쌍이 안철수의 상징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정치가 썩었고 시끄러운 것은 사실인데, 그것의 반동으로 정치가 거세 된, 순수 전문가들로 이뤄진 사람들이 매끄럽게 운영하는 국가에 대한 환상들이 안철수를 지지하게 되는 원인이 아닐까?
본래 이런 환상은 노무현 이후 CEO 이미지가 강했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그 시절에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국가를 효율적으로 관리 할 것이라는, 이명박에 대한 사람들의 환영을 봐도, 이런 환상이 안철수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 정치와 탈 정치라는 것은 정치 고유의 영토를 합리적으로 다스린다는 다소 반동적인 징후들로, 정치는 말 그대로 적대를 다스린다의 의미인데, 안철수 지지자들은 이 적대를 '다스린다'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없는 정치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의원수를 줄이다? 그것은 거시적인 접근이 아닌, 소란스런 무리들을 줄인다는 의미의 접근일 뿐이다. 물론 대중의 입장에선 통쾌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런 논리라면 의회를 제 맘대로 주무르려 했던 박정희와 독재 권력들의 태도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 자리를 안철수가 생각하는 전문가들로 치환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은 윤리적 선택의 문제기 때문에.. 예를들면 광우병 소고기를 먹을 확률이 0.0001%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수의 국민들에게 납득이 안 간다면 정부는 제 행위를 되 돌아보는 것을 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합리성이란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게 민주주의(적 정치적인 것의 문제)라면 어쩔것인가?
물론 안철수는 CEO라는 점만 이명박과 같고, 이명박과 다르게 IT 벤쳐라는 다소 자유주의적 합리성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지만, 그의 대통령관은 어떻게 보면 이명박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대통령을 단지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 '흄'이 말한 지식의 '다발(송관)'처럼 여기고 있고, 두루 살펴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하는 자리로 인식하고 있다. 마치 슈퍼 컴퓨터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연상시키는 주장이 아닌가?
대통령에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는 윤리적 행위는 둘째치고, 어떤 것이든 관념적 해석 없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계산하는 자리로 착각하고 있다. 그것이 왜 착각인가?
국익을 위해 어떤 것을 한다고 치자. 그것이 국익인 건 나라 전체를 이야기 하는 것인가? 주권자는 다양한 객체들이다. 이때의 나라라는 것은 그 객체를 뭉뚱그려 전체로 묶은 것이고, 객체들의 다양한 적대를 억압한 논리로 작용하게 된다. 예를들면 국익이라고 치장 된 한미 FTA는 농민과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피해를 줄 협정이었는데, 이때 동원한 국익이라는 것은 나라 전체의 '부'만 이야기 할 뿐, 계급적 이익이나 모순 따위는 삭제한 언어일 뿐이다. 즉 목적(국익)에 대한 합리적 선택이라는 것도, 그 목적이 왜곡하는 다양한 층위를 고려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프레임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고려하고 있나? 전혀... 그의 인터뷰나 책을 거들떠 봐도 그는 합리주의는 알지만 정치의 프레임이라는 면을 비 효율적인 것으로 격하시키고 있을 뿐이다. 요컨데 치열한 헤게모니 싸움은 탈 이념 탈 정치를 통해서 없어져야 할 과거의 유물이고, 전체는 합리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통은 실패 한 것이다. 모피아들에 둘러싸인 노통은 목적(국익)의 다양한 갈등과 프레임을 고려하지 못했으며, 그 프레임들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윤리성을 위한 성찰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미 FTA의 외부 충격론, 일본과 중국 사이의 샌드위치론, 수출 지상주의같은 FTA를 해야 할 필연적 귀결들(물론 연구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부차적인 것들로 다뤄졌다)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것이 합리적이니까...)
이런 인식들이 전문가 정치(그의 주변에 유난히 모피들이 몰려 있다는 것만 봐도)에 집착하는 이유지 않을까? 하지만 엘리뜨에 대한 집착, 관료 출신에 대한 환상, CEO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은 계급이나 사회 적대에 의해 산산히 조각 날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에게 지식인의 책무란 지식의 영역이나 합리적 선택 따위의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고 그것을 환기 시켜야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그것이 정치의 바른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당과 새누리당이라는 양당 체제의 속성을 극복하면서도 그것의 손 쉬운 해결책인 전문가 정치 따위로 빠지지 않는, 근본적인 성찰을해야 한다. 안철수와 그를 상징하는 무엇들은 과연 근본적인 성찰을 위한 존재 또는 상징인가? 아니면 단지 정치과 이념의 거세 된 상태, 껄끄런 것이 사라진 상태의 전도된 도피처 유토피아의 상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