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는 죽어야만 끝나는 생명 외 또 다른 정치적 생명이 존재한다. 조선노동당원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기 전까지는 당생활에 참여하여야 한다.
1960년대 북한에서는 남녀가 선을 볼 때 제일 선호하는 대상은 당원이었다. 재산이나 인물보다도 당원이면 최고의 상대자로 꼽혔다. 부모가 당원이면 아이들도 긍지를 가지고 사는 시대였다.
당원이 되려면 여러 가지 조항이 있다. 우선은 토대가 좋아야 한다. 항일빨치산 연고거나 할아버지 때부터 소작농 출신, 노동계급 출신이면 문제될 것이 없다. 지주, 월남자, 조국전쟁 때 '치안대'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그 자식, 손자들은 아무리 열성스럽게 일해도 당원이 되기는 힘들다.
고난의 행군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 속에는 당원들도 포함되어있다. 오로지 당만 믿고 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이 고난은 당원에게도 예외로 될 수 없었다. 노동당은 자신들에게 충실했던 당원들도 구제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떠밀었다.
2013년 남한에 정착한 김옥련 씨는 "어머니는 모범 기대공으로 처녀시절에 입당하셨다고 늘 자랑처럼 자식들에게 말했다. 항상 당증은 무슨 보물처럼 식구들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건사하셨는데 비닐에 여섯 번 정도 싸고 빨간 천으로 곱게 개어서 가죽케이스에 넣어 보관하셨다."고 증언했다.
"언니의 결혼상대로 중국친척이 있는 사람이 중매가 들어오자 부모님이 대번에 반대하셨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토대가 걸려 당원이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훗날 사는 게 더 힘들어지자 그 때 그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지 못한 걸 부모님이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또 "환갑이 지나 퇴직한 후에도 매주 목요일은 생활총화의 날이다. 보통 여맹은 60살이 지나면 찾지 않는다. 당원은 60이 아니라 80이라도 죽지 않고 치매만 오지 않으면 당생활을 해야 한다. 어쩌다 사정이 생겨 생활총화에 가지 못하면 세포비서가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비판도 하고 망신을 준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루는 어머니가 옷장을 발칵 뒤집는 것이다. 사연인즉 저번 주 생활총화에 다녀온 후 당증을 되는 대로 옷장에 집어넣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참 후에 나타난 당증을 보면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귀찮아서 못살겠다. 나이 들면 당증을 공짜로 바쳤으면 좋겠다. 자식에게 상속하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어 "장사를 해도 단속이 당하면 세포에 통보하고 문제를 크게 세운다. 당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원이 어기면 되냐고 정치적으로 걸고 든다. 먹을 쌀이 없어도 정해진 날은 당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북한 노동당원들의 현실이다. 당원은 밥을 굶을지언정 조직규율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 씨는 "백발의 아버지가 목요일만 되면 편히 쉬지도 못하고 보풀이 인 당생활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대문을 나가시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웠다. 설이 지나면 당원들이 노동신문사설을 읽고 세포마다 문답식경연까지 조직한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등잔 밑에서 공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전했다.
"저녁이면 친구 분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한마디씩 하신다. 언제면 당생활에서 해방이 될지 한숨만 쉬신다. 그러면서도 돌아오는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세포회의로 가신다. 노동당이 존재하는 한, 바람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어르신들이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