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왜곡 보도를 내보낸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고 소련은 시기가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명백한 오보였지만 그 여파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유일상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동아일보의 보도 이후 신탁통치에 찬성한 세력은 좌익으로 몰리고 친일파와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외세의존 세력들이 오히려 지배계층을 재구성했다. 다수 국민들의 반식민지·반외세 감정을 포착해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통치’라는 선전구호 아래 국내의 자주·민주세력을 매도하고 고문 기술자를 포함한 친일파를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동아일보의 오보가 나간 뒤 남한 사회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들썩였다. 조선일보는 “죽음으로 신탁통치에 항거하자”는 제목으로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한국언론실증사’에 따르면 “그때까지 친일파는 매국노요 민족 반역자였는데 반탁운동을 ‘세탁’의 계기로 삼아 애국자로 둔갑했다.” 강만길 전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신문들의 오보와 선동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력이 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좌익 세력들은 동아일보 보도 이후 반탁운동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는데 미국과 소련의 군사정부가 남북을 분할 통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임시 민주정부를 설립하고 과도기적인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게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처음에는 반탁을 했다가 소련의 사주를 받아 찬탁으로 돌아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사료로 본 20세기 한국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익 친일세력들은 신탁통치 갈등을 이용해 전체적인 정치구도를 ‘찬탁=극좌·친소’라는 틀 속으로 몰아넣으며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어느덧 반탁은 애국이며 즉시 독립의 길이요, 찬탁은 매국이며 식민지화라는 등식이 성립돼 갔다.” 소련이 타스 통신을 통해 해명을 하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런 사실은 국내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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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5173#csidxdea12502fe56309af5903ff5f20f57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