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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이 일제시대 내내 청산리 전투, 봉오동 잔투와 같은 무장투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적으로 독립군이 의미 있는 무장투쟁을 한 시기는 1910-1920 기간이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는 모두 1920년에 일어난 전투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은 실제적으로 그 존재가 없어진다.
해산된 일부는 모택동의 팔로군으로 일부는 러시아 적군, 백군으로 옮겼다. 모택동이 누구인가 항일 무장투쟁보다는 국민당군과의 전투가 우선적이었던 인간이다. 팔로군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모택동에 의해 국공투쟁에 활용당한 것이다. 러시아 적군, 백군으로 편입된 조선인 또한 러시아 적군과 백군의 투쟁에 활용되었고 결국은 해방후 팔로군 출신과 러시아군 출신이 북한의 괴뢰정권 수립을 한 꼴이고 6.25 남침까지 저지른 꼴이다.
김구가 이끄는 임정은 실제적으로 전투병력이 없는 임시정부 기능이 컸고 1921년 임정의 주요 활동은 일제 요인 암살, 장개석 국민당과의 외교적 협조 였다. 이승만이 빤스런 했다고 하는데 이승만은 임정의 이러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파악하고 미국에서 활동으로 한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미국 정계에 알리고 설득함으로써 실제적인 외교적 영향력은 김구의 임시정부보다도 더 컸다.
1942년 좌우합작에 의해 조선의용대에서 쫒겨난 김원봉이 일부 80명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왔으나 그 이후 김원봉의 병력이 뚜렷한 업적을 냈다는 기록은 없다. 사실 김원봉이 속했던 조선의용대도 전투부대는 아니고 장개석이 국공합작후 선전부대로 비용을 지원해 주던 것인데 그마저도 김원봉은 최창익에게 왕따당해 할 수 없이 평소 반대하던 임정에 머리를 굽히고 참여한 것이다. 화북지방으로 옮긴 조선의용대는 후에 연안파로 북한 정권에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월북한 김원봉은 결국에는 김일성에게 6.25 전쟁에 이용당하고 다시 왕따 당한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그나마 김구의 임정의 일제에 대한 계속적인 항거,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약 등에 의해 연합국에 그 독립의지를 알린 것이 더 크지 1920년 이후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독립군의 전투가 기여한 부분은 미미하다. 하여간 루즈벨트, 장개석, 처칠의 주도하에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언급된 것은 김구의 임정의 중국에서의 할동과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이뤄낸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