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존의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절, 정권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 한국 현대사에서 왜곡된 국제적 사실들을 밝히는 데 공적을 남겼다. 단적인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이념대립이 아닌 반제국주의 성향이 짙다.'고 최초로 정의내린 인물이었다. 후에도 베트남 전쟁 때의 대한민국 국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보수정부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밖에도 단순한 반공논리만이 주입될 뿐 외부 정보가 거의 차단되었던 1970년대에 세계의 객관적 시각들과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소개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매카시즘을 조장하는 기존 방송이나 언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문제나 미국의 동북아 전략 등이 국가의 통제를 넘어 제대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하였던 것.
이 때문에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작)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간주되었는데, 문재인이 가장 좋아한 책으로 꼽기도 했다. 2005년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했을 때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같이 출연하여 과거의 자신에게 끼친 리영희 저작의 영향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신시대와 5공 시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 때문에 보수쪽 이들에게는 당연히 눈 밖에 나버리게 되었고, 이들은 그를 '빨갱이'라는등 인신공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다만 리영희 자신은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 단적인 예로 1998년에 방북해 고위직 인사들과 회담을 나눈적이 있었다. 리영희는 북한의 경직된 체제와 우상화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북의 고위직 인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비전향 장기수중에는 6.25 전쟁때 학살범들도 많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문제에 대해서 '북한 당국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책임을 강하게 묻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공법으로 잡혀들어갔을 때 도저히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이북 출신이긴 하지만 가족 모두가 한국 전쟁 이전에 남한으로 이주했고 한국 전쟁에 통역장교로 임관하여 전후까지 합쳐 7년 동안이나 직위에 있었던 예비역 소령인데다가, 비록 인사체계의 부실로 인해 없어졌지만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받은 터라 잡아낼 건덕지가 없었다. 결국 재판에서 11심까지 갔으나 1심에서 이미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2년형을 때리라고 밀서가 온 터라 감옥에 부당하게 갇히게 되었다.[6] 정치범으로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모친의 부음을 듣게 된다. 이 때의 아픔을 바탕으로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에선 일제 시대 재소자들보다 더 열악한 처우를 비판하며 법조인들은 임관 전에 자기 집 냉장고에 하루라도 갇혀보라는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김삼웅 독립운동관장이 아직 대상자가 살아있던 시기(2010년 4월 19일)부터 쓰던 평전이 있다. 다만 호평이 어느 정도 강한 것은 감안할 것. # 그는 리영희를 "한국의 소크라테스"로 평했다.
세뇌와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독재로 정신적 장애를 받은 모든이에게 애잔함을 느낀다...
옳곧은 소리, 진실을 얘기하면 곧 빨갱이로 매도했고,
그렇게 믿어야만했던 세대가 아직 살아있구나....
반공 논리는 곧 박정희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말하는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