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때는 아예 대모 자체가 힘들던 시대였고, 전두환 시대에도 독재 시절이라 집회의 자유가 잘 실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부당한 일들은 있었고 노동자들 중심으로 불법이 되는 집회를 가졌죠. 이들이 강제 제압 당하면서 분신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경찰에 무력 대응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70년대를 겪으면서 대학가는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기치로 학생운동이 조직화되었고 마치 군사 조직처럼 움직입니다.
일부 학생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사상적 기치를 가지기 위해 북의 책동에 넘어가 '주체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이들은 추후 북의 현실을 파악하고 이탈하지만 아직도 이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종북 세력입니다.
여하튼 80년대의 집회는 큰 줄기의 독재타도와 민주화 및 노동권 확보를 내걸고 무력 투쟁 양상을 띄게 됩니다.
이를 명목대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에서는 시절에 기세해 사회적 불만을 토로하는 수단으로 집회나 데모를 이용하기 합니다.
하여 몇 명이 시작해서 구호만 외치면 당시 불만이 많았던 민중들은 합세하거나 암묵적지지를 통해 사태가 커지고 대규모 운동으로 변화되어 번졌습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입장이 없어도 집회에 지지를 하거나 가담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말합니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은 끊이지 않는 이런 데모에 뭔가 강경 대응이 필요함을 느꼈고, 강경 진압을 통해 자신의 강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도 애초 시작은 당대의 일반 집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데 경찰이 아닌 공수부대가 파견되고 일반 집회에 총과 무기를 가져다 진압하고 무조건 잡아가는 통에 광주 시민은 심한 불쾌감과 차별을 느낍니다.
당시 초기 단계에 시위 참여자들은 멋도 모르고 나선 광주 지역의 아들 달들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강경진압 당하고 광주 시민 대부분은 자식이나 형제가 잡혀가거나 번법자 취급 당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에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이 광주 도청을 점거하고 무기고의 무기를 획득하면서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데 이에 전두환 정권은 반역으로 규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를 봉쇄하며 이들을 강경 진압합니다.
그러면서 광주 지역민들은 무차별적으로 진압되고 발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이들이 모두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며 형이 다치고 동생이 다쳐서 따라 나왔다가 희생된 사람들도 많으며 이들의 희생을 목격한 광주 주민들은 자신의 자식과 형제를 잃음에 통분하고 상처 받았습니다.
이가 진상 규명 없이 당시 정권의 여론 조작과 묵살로 넘어갔고, 이는 광주 주민 전체를 죄인처럼 만들어버립니다.
후에 이는 국가에 의한 범죄로 규정되었고, 그들의 희생에 대해 독재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아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지금에 이릅니다.
당시 광주가 이 일로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민주화 의거로 직계가 유공자 인증을 받은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