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7일 광주에서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지 마라는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수사한다는 이유로 전두환 장군이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의 시위를 두려워한 군대는 대학에 휴교령(학교를 쉬게함)을 내리고 대학생들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학생들과 군인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군인들은 곤봉으로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서 시위를 진압합니다. 전남대 앞에서의 첫 충돌로 5·18 민주화운동의 슬픈 역사는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거세어진 시위대에 불안을 느낀 군대는 더 많은 군대를 광주에 보내어 시위를 진압하게 됩니다.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를 가진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위해 시내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고등학생까지 시위대에 참여하게 됩니다. 계엄군은 고등학교까지 휴교령을 내리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게문을 닫고 직장을 내버려 둔채 시내에 몰려들었습니다. 또 택시와 버스들이 차량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의 통제를 받은 방송과 신문은 광주의 상황을 북한의 명령을 따라 폭도들에 의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20일 군대의 총격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내롤 몰려 들었습니다. 21일 금남로에서 시위중이던 시민들을 향해 군대는 무차별적인 집중사격을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금남로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군대의 발포에 스스로를 지켜야했던 시민들은 경찰서와 탄약고를 습격해 무기로 무장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시민군이라 이름을 짓고 군인들을 광주 외각으로 몰아냈으며 군대가 다시 밀려오는 27일까지 경찰대신 광주의 질서를 유지합니다. 이 기간동안 광주는 그 어느때보다 평화로웠으며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아름다운 하나였다고 합니다.
광주시민들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주시민의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이 시내로 쳐들어 왔습니다. 시민군들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잘 훈련되고 무장된 군대를 막기에는 힘이 너무나 모자랐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군대의 무자비한 도청 진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시위에 참가했던 시민들은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로서 5·18 민주화운동은 끝이 났지만 결코 광주시민은 패하지 않았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그 후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데 값진 밑거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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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국민들에게 총칼을 들이민 군대는 어떻게 되던가요?
리비아 카다피가 어떻게 되었죠?
5.18 원인 제공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떻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