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적은 625 인민재판당시 호남의 상황과 연결해 유추해볼수 잇는상황으로
625종전후 지리산의 빨치산들중 생존자들은 지리산인근으로 흩어져 주변의 산사
교회, 성당등의 종교단체에 많이 귀의함.
당시 그들은 신분자체가 불분명해 일반사회에 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임
그들중엔 식자층들이 많았기에 잠시 종교계에 들어가 그곳에서 여러 봉사활동을
하면서 목회자들로 부터 높은 신임을 얻을수있었슴.
종교단체들 특성상 과거를 묻지않았구, 그들은 그곳에서 모범적인 행동으로
개인교회(개척교회), 산사(개인창업)를 물려받은 이들이 제법있구, 그들의 자녀들역시
그들의 그런사상의 영향을 받을수밖에 없었슴
게중에 카톨릭의 수도사,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을 통해 결국 서품을 받는 사람들도
나왔을것으로 추정됨
목회자의 신분은 어린소년 소녀들에게 아주많은 영향을 끼침.. 문규현신부가
그런사람인지 확인할순없으나 만약 문신부가 위의 저런계통으로 주변인근지역이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맣다면 그지역은 사상적으로 영향를받을수밖에 없었을
것임.
그지역의 특징이 오히려 일부 불교, 교회, 성당이 다른지역과 달리 사상적인면에서
공조활동을 많이 한다는건 눈여겨봐야할것임..
명확한 증거가 없는 정황을 바탕으로한 유추일뿐이지만. 지금 특정지역의 종교들만
사상적,정치적으로 지나치게 활동하는걸 과연 우연으로만 볼수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