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 제가 59학번이에요. (웃음) 몇 년 전에 서울대 가서 09학번 학생들과 만났어요. 59와 09의 만남이었죠. 50년의 세월차가 있더라고요. 물어보신 사건, 참 오래됐네요. 그때 상황을 여러분은 잘 모르실거에요. 대학 2학년 때 4.19가 있었고요. 3학년 때 5.16 군사혁명 이후로 학생들의 저항과 반대 분위기가 형성되었어요. 제가 학생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사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란 게 없었어요,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는 걸 들었죠.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중앙정보부에서 취조할 때도 자기들끼리 얘기 하더라고요 ‘3년, 5년일꺼야’ 라고요. 그런데 사형구형이라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저는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현역으로 육군중위였기 때문이죠. 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났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拿捕)되어 북한에 억류되기도 했죠. 또 삼선개헌, 한일회담, 독도문제가 거론되며 복잡한 상황이었죠. 정확하진 않지만, 당시 서울대 학생서클 간부 하나를 사형을 시켜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정재승 : 아, 그러니까 통일혁명당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주요 간부라는 누명을 쓰신거네요.
신영복 : 사실, 문리대 정치과 선배 한 분이 관련이 있었어요. 북한에 다녀오고 간첩사건과 관련이 있었고요. 난 학생서클 1세대였고,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죠.
정재승 : 당시에 150여명의 간첩단 사건 같은 게 나왔죠.
신영복 : 네.
정재승 : 어떻게 보면 억울한 상황으로 감옥에 가고, 무기징역까지 선고 받으신거네요.
신영복 : 여러 가지 생각이 참 많았죠. 조금씩 자기 문제를 사회적 관점, 역사적 관점으로 보게도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역사적 격동기에 감옥에서 인생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더라고요. 나도 그 중 하나구나, 팔자구나 생각했죠.
유정아 :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것이 나의 일이 되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인생을 다시 극복하지 못하게도 만들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청춘을 보내며 자기성찰적인 글이 나왔는지요.
정재승 : 정말요. 그런데도 피부가 너무 뽀야세요. 동안의 비결은 뭔가요 (웃음)
신영복 : (웃음) 당시 150명이 구속됐어요. 선배 후배들이 다 들어갔지요. 나는 후배들을 많이 데리고 들어온 선배입장이었기 때문에 죄책감, 미안함으로 고통스러웠어요. 나 자신의 문제보다 그것이 훨씬 고통스러웠죠. 또, 조용히 혼자 있을 땐 ‘사형이라니. 너무 빨리 죽는구나’ 이런 쓸쓸한 마음이 들었어요. 할 것도 참 많았는데 말이죠. 막상 무기로 감형이 되고 나서는 암담하기도 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용케 잘 걸어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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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