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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친일인명사전>의 전면 공개(8일)를 사흘 앞둔 5일, 이 사전에 친일인사로 수록된 박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이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 편지 등을 보냈다고 보도한 당시 <만주신문> 기사를 함께 공개했다.
'박정희 혈서'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이 신문은 당시 일제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한 "경상북도 문경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피로 쓴 편지가 송부돼 관계자를 감격시켰다"며 그의 사진을 함께 보도했다.
박 전 대통령은 혈서에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 한 번 죽음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각오를 밝혔다. 이 사실을 확인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1월 펴낸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항목에 혈서 이야기를 포함했다.
일본인(日本人)으로서 견마(犬馬)의 충성 박정희 혈서(血書) '혈서(血書)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라는 기사에 따르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라는 혈서를 써 편지에 동봉. ‘日本人’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임. 확실히 하겠음. 목숨을 다해 충성(忠誠)을 다할 각오임.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日本)을 위해 어떤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임
다카키 마사오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백강 조경한 후손이자 독립운동사 연구가 심정섭씨 반박
박정희 비밀독립군이란 새누리당 주장에 “명백한 거짓”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실제로는 ‘비밀 독립군’이었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에 대해, 이 사실을 처음 말한 것으로 알려진 임시정부 요인 백강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가 “명백한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백강 선생의 외손자이자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심정섭(72)씨는 “박정희가 우리 외조부를 찾아온 것은 맞다. 그러나
이장우 새누리당 대변인은 지난 20일 국회 브리핑에서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오히려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백강 조경환(조경한의 오류) 선생님께서는 박 전 대통령을 독립군을 도운 군인으로 기억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말해 박 전 대통령이 친일파가 아닌 비밀 독립군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변인의 이런 주장은 2004년 <세계일보>에 기고된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의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씨는 기고문에서 백강 선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박 전 대통령이 백강 선생의 면목동 집에 찾아가 큰 절을 한뒤 자신을 일본군 중좌 다카키 마사오라고 소개하니, 백강 선생은 조선인 병사들을 상해 임시정부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어 놀랍고도 반가워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씨의 이런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이씨의 글 외에는 백강 선생이 박 전 대통령을 비밀 독립군으로 기억한다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사실 오류도 많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백강 선생의 이름은 조경환이 아닌 조경한이다. 또 박정희는 일본군 중좌가 아닌 만주군 중위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해가 아닌 중경에 있어 만주에 있던 박정희가 중국 남서부의 임시정부로 조선인 병사를 빼돌렸다는 말은 성립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고상만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시비에스>(CBS)의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박정희는 당시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회의 의장이었고, 당시 백강 선생의 집은 면목동이 아니라 흑석동이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백강 선생의 외손자로 평생을 친일문제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바친 심정섭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은 “박정희와 외조부가 나눈 실제 대화는 이씨의 기고문과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밝혔다. 심씨가 외조부에게 직접 전해들었다는 내용은,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준비할 무렵 박 전 대통령이 백강 선생을 찾아와 큰절을 한 뒤 “저는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해방 후 한독당에 입당하지 못했고, 형제 때문에 남로당 입당해 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가 반공 정신이 미약해지고 위기에 처해 이렇게 혁명을 일으켰습니다”라며 자신의 행적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저는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해방 후 한독당에 입당하지 못했고,
형제 때문에 남로당 입당해 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저는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위안부는 한국의 책임, 박정희 친일역사관 파문 -박근령 일본 두둔 영상 (TV조선 영상 포함)
박근령 위안부 발언에 대해 언니인 박근혜 대통령은 어떠한 입장인지가 궁금하다는 국내 누리꾼들의 반응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한 국가의 지도자의 동생이 대놓고 ‘친일적 발언’을 함에 따라 여야 정치권이 어떠한 입장을 표명할지도 관심이다.
당장 야권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이 어떠한 논평을 쏟아낼지도 덩달아 관심이다.
국내 친일파들로 점철된 지배계층은 사실상 ‘당연한 발언’이라는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누리꾼들도 현지 포털사이트 등에 ‘한국 대통령의 여동생이 이제야 옳은 말을 했다’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야말로 ‘망신’이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의 여동생 박근령은 최근 일본 포털사이트 니코니코와의 특별대담에서 “일본에 위안부 문제 사과를 계속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일본에 사과를 자꾸 얘기하는 것은 부당하다. 천황까지 합해서 네 번이나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는데…”라고 친일적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박근령은 “19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로 경제재건을 이룬 만큼 일본에 보상요구를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며 “(군 위안부 할머니를)우리가 모시고 아픈 것을 위로해드리는 나라 형편이 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박정희딸 친일역사관 파문 신사참배 내정간섭,위안부 한국책임-뉴라이트 학자 “일본 아베 담화 진중한 명문장” … 이영훈 서울대 교수 ‘망언’
대표적 뉴라이트 계열 학자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4·사진)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를 두고 “진중하게 쓰인 훌륭한 문장”이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8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선진사회만들기연대 역사포럼 창립기념 강연회에서 ‘좌우파 간의 역사인식은 왜 다른가’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교수는 아베 담화에 대해 “격동의 역사에 대한 나라마다의 기억은 각각의 처지가 달랐기 때문에 결코 같을 수가 없다”면서 “부드러운 얼굴로 각자의 기억을 존중하는 가운데 시선을 함께 미래로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중국 등으로부터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일본 정부의 기존 과거사 인식보다 훨씬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아베 담화를 수용하자는 취지다.
이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 담화문을 두고 “살아있는 증인이 있는데 역사를 가린다”고 비판한 데 대해선 “일국의 원수가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인 수사였다”고 말했다.
대신 이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근원의 적수는 우리의 민족주의”라며 “민족주의는 온 한국인을 교도로 지배하는 유사종교와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이웃 나라와의 갈등을 멈추지 않는 것은 강포한 민족주의의 위력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며 “그런 상태에서 참된 의미의 자유·독립·인권·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한 대표적인 뉴라이트 계열 학자다.
이영훈 대학교수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출생:1951년 대구광역시
소속:서울대학교(교수)
학력: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뉴라이트 소장 안병직 수제자)-이명박 대선 총괄 최측근
박근혜 대선 총괄이자 언론장악 박효종 -뉴라이트 공동대표 , 박근혜 대선 책임자, 박근혜 최측근
안병직 대학교수
출생
1936년 6월 28일, 경상남도 함안
1936년 6월 28일, 경상남도 함안
1936년 6월 28일, 경상남도 함안
1936년 6월 28일, 경상남도 함안
1936년 6월 28일, 경상남도 함안
시대정신(이사장), 서울대학교(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2011년 제22회 시장경제대상 공로부문 대상
2007.09~2008.05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2006.04~ 시대정신 이사장
2002~ 일본 후쿠이 현립대학 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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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는 대표적으로 종군위안부에 대해 "원래 한국에는 기생이 많다"고 발언했고, 야스쿠니 참배를 적극 옹호하며,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 비판에 대해서는 '내정간섭'이라고 말했다. 뼛속까지 극우인 그의 발언은 아마도 미리 계산된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일 텐데, 며칠 전 발언 중에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었다. 현직 일본 총리가 국회에 출석해서 '서울대'를 직접 언급한 것인데,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될 부분이다.
도대체 왜 아베는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대한민국의 국립대인 서울대를 언급했을까? 이건 절대 단순 인용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에 근거로 활용하기 위함이고, 자기들이 침략해서 식민지로 만들었던 나라의 최고 명문대를 식민지배 미화에 이용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야비한 짓이고, 뒤집어 보면 정치인으로서는 꽤 영리한 발언이다. 과연 아베가 직접 인용한 서울대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그걸 좀 밝혀보려고 한다
도대체 왜 아베는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대한민국의 국립대인 서울대를 언급했을까?
도대체 왜 아베는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대한민국의 국립대인 서울대를 언급했을까?
도대체 왜 아베는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대한민국의 국립대인 서울대를 언급했을까?
도대체 왜 아베는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대한민국의 국립대인 서울대를 언급했을까?
도대체 왜 아베는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대한민국의 국립대인 서울대를 언급했을까?
국내 대법원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립군 토벌사실을 인정한 판례가 확인돼 네티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09년 2월 대법원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시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내용의 책을 출간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기소된 아이필드 대표 유연식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근영씨는 논란이 되는 시기에 박 전 대통령이 문경소학교에서 근무했다는 서류를 제출했지만, 유씨는 중국 현지 증언과 역사자료를 토대로 책을 출간했다고 맞서왔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는 진보학자의 주장이 아닌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다만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을 덮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또한 일본인인 다카야나기 도시오 일본 법정대 교수조차도 "당시 공비로 불리던 독립군 토벌이 군관학교의 역할"이라며 "황국군인으로 길러진 청년 장교들이 만주국의 통치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이용됐다"고 했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110여회나 토벌했다"는 이야기는 진보학자의 주장이 아닌
1960년대 박정희추종자가 쓴 박정희 전기다.
다만 이 책은 박정희의 친일전력을 덮기 위해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경력을 반공투쟁으로 미화시켜 항일세력들을 공비들로 둔갑시켰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만주8단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기들의 증언을 통해 박정희가 일선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당시 박정희와 함께 우수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중국인 우쉬에원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나와 다른 2명의 동급생은 육사 졸업 후 항일 전선에 가담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로 다시 돌아가 견습군관을 거친 뒤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대x일베광역시박정희 혈서 조작설 유포하고 민족문제 연구소 모욕에 대법원 혈서 증거 정확하다-
"박정희 혈서 조작됐다"던 일베 회원, 자필 사과문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발굴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맹세 혈서를 두고 조작설을 유포한 온라인커뮤니티 '일간베스트(아래 일베)' 회원이 연구소에 사과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3일 "일베 회원 A씨가 허위사실 유포를 인정하고 자필 사과문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이 회원은 그동안 일베 등에 반복적으로 '박정희 혈서는 조작됐다'는 주장을 퍼뜨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고소당했다. 연구소는 이때 강용석 전 의원과 정미홍 전 아나운서 등에게도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
'박정희 혈서'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이 신문은 당시 일제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한 "경상북도 문경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피로 쓴 편지가 송부돼 관계자를 감격시켰다"며 그의 사진을 함께 보도했다.
박 전 대통령은 혈서에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 한 번 죽음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각오를 밝혔다. 이 사실을 확인한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1월 펴낸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항목에 혈서 이야기를 포함했다.
그런데 A씨는 2012년 대선 즈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는 조작이라는 글을 일베에 올렸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의 형사조정에 동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연구소로 보낸 사과문에서 그는 "구글 검색 결과 '박정희 혈서는 조작'이라는 개인 블로그를 보고 진위도 확인 안 한 채 일베에 글을 게시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 성과와 노력을 폄하하고 조작이라 주장한 점에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A씨가 깊이 반성하고 일베 탈퇴 등 재발 방지를 약속한 만큼 민족문제연구소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강 전 의원과 정 전 아나운서에 대해서는 고소를 취하하지 않을 방침이다.
박씨 쪽 변호인은 “만주국군은 만주국의 군대이므로 일본군과는 다르다”, “만주국군은 공산군과 싸운 것이므로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박 전 대통령이 혈서를 쓰고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증거자료를 법원에 제출했고, 법원은 11월6일 박씨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후손이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연구소의 사전 발행을 금지할 정도로 그 사실이 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소명되지 않는다”
후손의 자료는 연구소의 자료를 넘지 못한다.
연구소의 박정희 친일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연구소는 박정희 친일 자료를 제출했고
유족은 반박자료를 제출했으나
유족의 자료는 법원이 인정하지 않음
연구소측의 자료를 신싱성이 높은 역사적 자료로 봄
●이명희(경북문경) 일본장학금으로 공부한 뉴라이트교과서만든 공주대교수
●안병직(경남함안)뉴라이트재단 이사장
~일본보다 독도가 우리땅이란 증거 많다고 주장못한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없다. ~김구,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이영훈(대구) 안병직 수제자, 각종 뉴라이트발언 연구로 유명
●뉴라이트창립주도인물, 전 전국뉴라이트연합의장-김진홍(경북청송)
●박근혜(대구)-뉴라이트와 한나라당의 길 다르지 않다
●박정희(구미)-친일혈서 충성맹서 왜구장교
●이태진 -뉴라이트,전 국사편찬위원장(경북성주)
●유영익(진주)이 국사편찬위원장-한국인은 열등하고 아들은 미국국적으로 돌려놓고 병역면제
●부산국회의원 하태경
- 하태경 의원 “문창극 ‘위안부 발언’ 창의적 발상…온누리교회 강연 보니 역사관 낙천적이고 건강해” 논란
위안부 할머니 + 일제 피해자 유족, 해운대기장을 하태경 후보 낙선 운동 나서
후쿠다 타케오(일본 대장성 주계국 국장)가 한국을 방문했을때 술자리에서 한일 관료들이 모여 이야기 하고 있을때
한국측 어느 고관이 과거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에 대해 비난하는 투의 발언을 시작하자 그는 너그럽게 이야기 하였다.
일본의 조선통치는 그렇게 나쁜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매우 가난한 농가의 아이로 학교도 다닐수 없었는데,일본인이 와서 의무교육을 시키지 않는 부모는 벌을 받는다고
명령을 해서 부모는 할수없이 소중한 노동력이었던 나를 학교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성적이 좋았기 대문에 일본인 선생이 사범학교에 가라고 주선해주었다.
게다가 군관학교를 나오고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서 수석으로 졸업도 할수 있었다.
졸업식에선 일본인을 포함한 졸업생을 대표해서 답사를 읽었다.
일본의 교육은 의외로 공평했다고 생각하고, 일본이 한 정치도 나는 감정적으로 비난할 마음은 없다.
오히려 나는 일본을 평가하고 있다.......
5·16 직후인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방미(訪美)에 앞서 일본에 들러 이케다 총리 등 일본 고위 정객들을 만난다. 총리관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박 의장은 일본인들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선배님들”이라고 불러 그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선배님들, 우릴 좀 도와주십시오. 일본은 분명 우리보다 앞섰으니 형님으로 모시겠소. 그러니 형 같은 기분으로 우릴 키워 주시오. 그리고 청구권 같은 문제 신경 쓰지 마시오.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오. 우린 우리 힘으로 경제를 일으키겠소. 하지만 한국이란 자동차가 발동할 때 뒤에서 조금만 밀어주면 고맙겠소.”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기시 전 총리는 물론 이케다 총리까지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고 박 의장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쿠데타의 주역이라 호골(虎骨)인줄 알았더니 겸손하고 상식적이다.” “명치유신 때의 의사(義士)를 보는 것 같다. (박 의장은) 겉은 예의바르지만 속은 알찬 무서운 지도자다.”
위의 일화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이동원 전 외무장관이 펴낸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만남이 이승만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지지부진해 꺼져가던 한일회담이란 장작에 다시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만주일보가 1935년에 폐간됐다고 개소리하시는데,
日本の植民地であった〈満州〉で発行されていた邦字・日刊新聞。日露戦争直後,1905年10月25日,現遼寧省大連市で創刊された。27年11月1日,《遼東新報》と合併,紙名を《満洲日報》と改題。35年8月,同じく有力な競争相手であった《大連新聞》(創刊1920年5月5日)を併合,再び紙名を《満洲日日新聞》にもどす。38年12月1日,本社を奉天市(現,瀋陽市)に移し,大連支社発行のものを《大連日日新聞》と改題,敗戦にいたる
간단히 해석하면 35년 유력한 경쟁상대였던 <<대련신문>>을 합병, 다시 이름을 <만주일일신문>으로 고친다. 그리고 38년 12월 1일 본사를 봉천시로 옮기고, 대련지사에서 발행한 신문을 <대련일일신문>으로 개명, 패전을 맞이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일베까페에서 반박자료로 게시한 곳에서 마이크로 필름에 대한 대응자료로서 신문 날조설을 들먹이고 있는데, 날조자료 입니다. 일본 국립 도서관에서도 보관중인 자료를 가짜라고 우기다니.. 정말 대단들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