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특정 회원에 대한 반말,욕설 글(운영원칙 2,3항) 3회 위반시 접근 차단 조치 됩니다.(원인제공과 관계없이 조치)
하오니, 절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거법 위반 및 정치관계법 위반행위 신고는 아래 중앙선거관리 위원회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http://www.nec.go.kr
HOME > 커뮤니티 > 정치 게시판
 
작성일 : 13-03-20 12:56
5.18 (1)
 글쓴이 : 귀괴괵
조회 : 2,697  

들어가는 글
왜 전두환은 군사 반란자인가?
혁명과 쿠데타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없다. 그렇지만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는 무게로 따질 수 없을 만큼 크다. 아래에서 위를 치든, 위가 위를 치든, 옆이 옆을 치든지 간에 모두 명분을 내세우지만 폭력을 동원해 헌법을 위배하는 행동임에는 다르지 않다. 오직 구분점은 국민 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에서 쿠데타와 혁명으로 갈리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혁명이 3번 일어 났다고 보는데, 둘은 4.19시민혁명과 5.16군사혁명으로 권력이 매개된 정치혁명이었고, 나머지 하나의 혁명은 국민들 스스로가 오랜 시간에 거쳐 점진적으로 사회환경을 변화 시켜 온 사회혁명이다.
전두환의 행위는 그저 동일체제 안에서 지배권력 장악만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명분도 없었고 대중의 지지마저 갖추지 못했기에 명백한 쿠데타였으며, 그는 반란자였다. 전두환은 정당한 정치활동을 금지하였으며, 군대를 사병화 하여 동원해 국민을 학살했으며, 저항파를 기습체포하고, 정부요인을 불법체포와 감금하고, 언론기관을 장시간 점령하여 검열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탐했다.
<12.12 반란자들의 쿠데타 후 정승화 제거기념 12월 14일의 기념사진 촬영>
12.12 반란사태
박정희 서거 직후 계엄이 실시되면서 계엄사령관을 겸직하게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군대를 부패하게 하던 사조직- 특히 대표적으로 부패권력집단이었던 하나회를 분쇄하기 위해 12.13 행정부 개각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발령내려고 했다.
국방부차관 김용휴가 전두환에게 정보를 빼돌렸고, 전두환은 개각 전날인 12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정했다.
"노 장군(노태우)에 의하면...(정승화를 제거해야 겠다고)... 전 장군(전두환)의 결심이 이미 11월 초에 확고히 섰으며... 12월 12일은 부총리였던 신현확씨가 국무총리에 내정되어 다음날 13일에 국무회의가 열려 새로운 내각의 구성을 논의하게끔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두환 장군은 개각 전날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하고, 그 결과가 국무회의에 연결, 군의 인사에 반영된다면 10.26사건 수사는 수사대로 완결되고 육군참모총장의 자연스런 교체가 가능하여 군의 신뢰와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5공화국 전사 3편, 보안사 1982
12월 12일 1차 쿠데타를 한 전두환에게는 동지라고는 오직 같이 총을 든 반란군인들 밖에는 없었다. 적어도 박정희의 봉기는 한강을 건넌 당일 미8군 정보대에서 서울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조사에서 조건부 지지까지 포함하여 70% 정도가 찬성한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적 반대파를 제외하고는 4.19시민혁명정권의 무능력과 (친북좌파들의 연방제 통일난동으로 인한) 사회불안으로 힘겨워 하던 국민들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했다.
반면에 전두환은 아직 대통령 권력을 탈취하지도 진급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같은 소장 계급에 머물러 있었지만 국민들의 반대는 미리부터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전두환은 국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이제와서 전두환마저 보수주의 정당성에 이용하려고 보수주의진영에서 보수를 가장한 극소수 문외한들이 설치고 있지만, 아무리 후세의 평가에 의해 역사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역시 그 당시 국민들의 반전두환 정서가 더 정당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가 되기에 전두환은 끝내 반역자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전두환은 권력 찬탈후 보여 준 역사적 성과가 없다.
서울의 봄
서울의 봄은 모든 사람들을 설레이게 하는 가운데 특히 기존 야당 정치인들에게는 축복이 내려진 듯 했다. 정치적으로도 대통령 최규하가 5월6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정치 발전 일정은 순조롭다고 강조해야 했을만큼 새로운 정치 환경이 도래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5월 7일에는 국민연합(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 발표를 통해 계엄령 해제, 정부의 일방적 개헌시도 중단, 신현확과 전두환 퇴진, 정치일정 단축 등을 요구했다.
학교들도 역시 79년의 기나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80년 봄 다시 개강을 맞으면서 기존과 다르게 역동적인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강제적인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3월 28일 서울대 총학생회의 출범을 시작으로 직접선거에 의한 총학생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학원민주화' 열기가 급속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4월 들어 21개 대학에서는 부패한 총장 학장들을 퇴진 시키려는 운동이 펼쳐졌고, 24개 대학에서는 어용교수 퇴진을, 12개 대학에서는 재단비리 척결을, 11개 대학에서는 재단의 교육시설 투자를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됐다. 4월 24일부터는 서울지역 대학 361명의 교수들이 부패한 사학재단 경영자 퇴진을 요구했다.
학내 안정화에 치중하던 대학생들은 정치에도 시야를 넓혀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학내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계엄령 해제, 전두환과 신현확 퇴진, 노동3권 보장 등을 정부가 실천한다면을 조건부로 내걸어 기존의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중단하기도 했다.
5월 1일에는 서울대 총학생회가 철야 토론을 통해서, 5월 10일에는 고려대에 열린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 모임에서도 비상계엄 즉각 해제, 전두환과 신현확 퇴진 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했다.
5월 7일 외국어대생 800여명의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서울지역 대학은 학내 문제에서 전두환 퇴진이라는 정치 문제로 방향을 본격적으로 선회하게 된다.
5월 13일 연세대가 주체가 된 서울지역 6개 대학생들 2,500여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가두시위를 본격화 하면서 더욱 확산되어, 5월 14일에는 서울지역 27개 대학생들 7만여명이 서울 시내 가두 시위를 밤 10시 넘어서까지 벌였다.
5.17 전국계엄확대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아니 광주에서 대량학살이라는 반란자 전두환의 학살이 시작되기 3일 전인 5월 15일 오후 2시에는 서울지역 35개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하여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등 민주화 요구 시위를 이어갔다. (이 때 학생 시위대가 현장에서 빼앗은 시내버스 1대가 돌진하여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 당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여론이 이처럼 거세지자 5월 15일 밤 7시 50분에 국무총리 신현확이 특별담화를 통해 연말안으로 개헌안을 확정하고 81년 상반기에 대선과 총선을 실시하여 정권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길거리로 몰려 나왔던 학생들은 이 담화를 믿고 '서울역 회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속하게 시위를 중지하면서 5월 15일 자정에 서울지역 23개 대학과 지방 24개 대학 총학생회장 모임에서 수업에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충정작전 표지, 계엄확대전 미리 내린 준비명령, 전두환 중장진급 의결서, 군부통치반대하는 국민들>
1. 국민대학살의 서곡, 전두환의 5.17 계엄확대 만행
1) 5.17 비상계엄의 실체
5월 8일 계엄사령부(이희성)의 긴급 계엄위원회(황영시)가 열린 회의장에 갑자기 중앙정보부(전두환)에서 '학원대책방향'이라는 문건을 보내왔다.
1단계(5.7-5.10): 문교부장관 경고담화 발표 및 학생들의 교외진출 저지,
2단계(5.11-5.13): 주동자 색출 및 범법자 처벌,
3단게(5.14-5.16): 대학 휴교 및 주동자 등 일제 검속 및 계엄사령관 담화 발표,
4단계(5.17-): 비상대책 강구와 적지 조치를 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 긴급계엄회의 결과보고, 보안사 1980.5.8
학원대책방향이라는 문건을 더 살펴보면 이미 1단계 조치에서도 "사태 악화에 대비 군 병력 출동 태세 완비 등 시가 집단 시위난동 방지를 위한 사전 대비태세 완비(내무,계엄사,중정)"라고 제시함으로써 이미 군대를 동원한 국민 학살을 예고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길거리 시위가 5월 7일 처음 발생했기 때문에 이 문건은5월 8일 계엄위원회에 제출되기 훨씬 이전에 작성됐다는 점에서 전두환의 국민 학살 음모 진행에 더 놀라게 된다.
또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김재명)가 작성한 문건 '학생시위 대처 방안'에서도 군대 투입을 준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단계(5.7-5.10): 문교부 담화문 발표와 군 투입 준비,
2단계(5.11-13): 학교 자진휴교 유도하고 시위 주동자 신상을 부모에게 통보하며, 포고령 발표,
3단계(5.14-15): 강제 휴교, 시위 주동자 색출하고 계엄포고,
4단계(5.17): 계엄군 투입/으로 명시되어 있다. - 계엄일지, 보안사 1980.5.8
이렇듯 전두환은 시위가 격해져서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이 아니라 아에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서기 이전부터 철저하게 애초부터 아에 군대를 투입하려고 작정하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실제로 5월 17일 밤9시40분: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실시 24시 00분: 비상계엄 전국확대,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등으로 실행됐다.
즉 발생하지도 않았던 학생 가두시위를 빌미로 미리부터 계엄군을 풀어 놓기 위한 군사작전을 세워놓고서 5.17전국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5월16일 오전 10시에 열린 계엄위원회 회의에서 조차도 전두환 지지 참석 군인들은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면서 군대를 투입한 강경 조치를 거듭 주장했다. - 5.18 수사기록, 서울중앙지검, 701보안부대장 김병두
2)북한 남침설의 실체
심지어는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가 침투했을 때 국가가 멸망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5.17 비상계엄과 공수부대 투입이 필요하다고 적고 있다. (5.17 전군 비상계엄 배경, 보안사 1980)
북한 남침설은 중앙정보부(전두환)의 2차장 김영선이 일본 내각조사실의 에비스라는 한반도 담당반장에게서 입수했다며 전두환에게 첩보를 보고한 것에서 시작됐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80년 4월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하고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에 맞춰 남침을 감행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김재규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남침을 연기하였다가 마침 5월들어 학생과 노동자 소요사태가 격화되자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5.15-5.20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그 근거로 김일성이 유고에서 오진우를 대동해서 소련 브레즈네프를 만났고, 조선일보의 주일파견 이 모 기자가 북한군이 휴전선에 배치 완료됐다고 일본 방위청에서 들었으며, 미 7함대 소속 항모 1척이 서해상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미 항모는 아에 이동없이 한미연합방공훈련에 참가하지도 않고 그냥 일본 요꾜스까에 정박중에 있었다.)
관련 첩보로 첨부된 내용에는 정작 한국군이 수집한 북한군 동향은 북한육군에 경계강화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평상시와 전혀 다름없이 이동이나 전개 징후가 없는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미국도 김일성이 여전히 루마니아에 체류중이고, 북한군에 특이징후가 없기에 일본측 제보는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이미 79년에도 성탄절 남침설(일본 외무성 동북아과장), 80년 1월 새해 남침설(주일 중공대사관 무관), 80년 2-3월 남침설(아세아 친선교류협회 업무국장, 주일 중공대사관 직원), 80년 5월 남침설(일본 공안조사처, 중공 신화사 기자, 대만 정보기관), 80년 가을 남침설(일본 공안조사처, 일본주재 중공기자)이 계속 재생산 확대되고 있었다.
당연히 육본 정보참모부는 남침일자에 전혀 근거가 없기에 가치 없다고 폐기시켰다. - 북괴남침설 분석, 육본 정보참모부 1980.5.10
이런 북한의 남침설에 대해서 5월12일 계엄사 일반참모부회의에서 황영시(육참차장겸 계엄사 부사령관)는 "북괴가 남침준비를 위해 병력전개를 완료했다는 일본의 첩보는 벌써 6회나 거짓말을 하고도 체면이 선다는 것인가? 혹시 그들의 고등술책일 수도 있다"고 짜증을 냈다. - 일반참모회의록, 계엄사령부 1980.5.12
그럼에도 이러한 북한 남침설을 위협적으로 민주화 운동 참여 국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끝까지 활용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육군본부에서 작성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서는 한국 내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를 '민주화 운동 지지자들은 북한의 선전 선동과 대남공세에 따라 혼란을 초래했으며, 따라서 공수부대를 동원한 충정계획은 정당했다'고 적고 있다. - 소요진압과 그 교훈, 육군본부 1989

3) 국민학살을 위한 충청작전 준비
80년 서울의 봄이 오고, 각 대학은 막 개강을 시작하던 시점인 80년 3월4일~3월6일까지 수경사에서 제1차 충정회의가 열렸다. 회의 목적은 수도권 소요사태 대비태세 점검이었다. 수도권에서 다중의 집단이 폭도활동을 하면 군과 경찰이 공세적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연이은 충정계획에 따라, 학생들이 학내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이미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해놓고서 군대를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 군에서는 4월부터 전국 각지로 군대를 이동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 4월 12일에는 특전사령부는 수도권 지역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차량 배치를 육참총장에게 요청했다.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긴급 소요 차량 건의, 작전 331.12, 특전사령부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는 "공지(공군과 육군) 협동작전으로 조기에 소요군중을 무력화 하여 병력 및 장비의 피해를 방지하고 신속한 작전종결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 소요진압 공중지원 방안 연구, 육군본부 1980
실제로 제1항공여단에는 5개 항공조가 편성됐으며, 특전사는 화학탄과 화염방사기 및 병력을 1항공여단에 지원하며 각급 부대는 공격용 헬기 500MD 운용계획수립과 훈련을 실시했다. - 작전명 제80-8호, 1군사령부 1980.4.20
9공수여단은 수도군단으로 이동 배속됐으며(육본 작전명령 제12호-80호), 해병1사단을 부산 지역의 진압 계엄군으로 동원을 지시했다가 해병1사단 2개 연대 규모로 축소시켰다.(국방부 작전전 제214호, 1980.5.6, 작전전 제225호 1980.5.9, 육본 작상전 제0-186호 1980.5.9).
제13공수특전여단은 5월7일에, 제11공수특전여단은 5월8일에 강원도 화천 오음리에서 경기도 김포 1공수여단에 합류했다. 20사단은 5월 15일에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 효창공원으로 이동 배치됐다. - 상황일지, 계엄사령부 1980.5.8.오전8시
3군 사령부 방송차량 7대가 특전사에 배치됐고, 1군사령부 장갑차 26대는 수도경비사령부에 지원됐고, 3군사령부 강갑차 24대는 수도사단으로 이동 배속됐다.
이처럼 전방에 있어야 할 대규모 부대들이 속속 민간학살을 위해 수도권으로 몰려 들면서 5월14일 오전8시50분을 기해 전국 각 부대에 육본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준비 지시를 내리면서 오후 1시에는 소요진압본부가 설치됐다. - 충정작전, 육군본부 1980
5월15일에는 12억원(1,191,125,000원)을 특전사와 화학부대 그리고 수경사에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따로 특전사가 요청한 진압봉 등의 시설자재 지급을 승인했다. - 참모회의 의제, 육군본부 1980.5.15
아직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려지기 이전(국무회의는 5월 17일 밤9시 42분 경에 열렸다)에 벌써 5월17일 오후4시50분에 육본에서는 모든 부대에 비상계엄 선포에 대비해 정위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작전상황일지, 육군본부 1980.5.17
5월 17일 오전 11시 40분에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44명)에서는 온통 군대의 정치개입 필요성이 언급됐다.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국회가 개원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진다. 우리나라 장래가 극히 염려된다"고 발언했다.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정치 및 중도단체의 문제인물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이 시점에서 요망되는 것이다... (불순분자가) 전국에 200~300명 될까요? 그들을 뽑아버리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여러 분의 의견을 요약하면 현 정세 하에서 전국비상계엄선포 건의로 본다"라고 발언했다. -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록, 보안사 1980
하지만 광주민주화 투쟁이 가열되자, 광주시민 전체를 전국에 불순분자가 겨우 200~300명에 불과하다면서도 불순분자도 아닌 형법상 반역자를 의미하는 이적자들로 이름지어 아에 적으로 규정지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내세운 전두환, 정당한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며 국회를 탱크로 무력점령>
실제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포고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은 금지됐으며, 5월 18일이 되자 김대중, 김종필 등 100여명의 주요 인물들은 끌려가고, 김영삼은 주택감금상태에 놓이게 되고, 국회는 탱크에 둘러 쌓인채 마비되었다.
회의를 마친 그 날 밤 수경사 무장병력에게 에워 쌓인채 5월 17일 밤9시 42분 경 개회된 국무회의는 찬반토론 없이 8분만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결의하고 다음날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한다.
(계엄포고 10호의 국민자유 압살 주요 내용만 적어본다.)
포고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법 제8조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은 당분간 휴교조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마.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3)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4) 대국민 학살작전 충전작전 화려한 휴가 돌입
5월 18일 00:00시를 기해 내려진 전국확대계엄에 따라 전국 201곳의 지역에 2만3천8백6십명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물론 실제 국민탄압은 하루 전날인 5월 17일 오후1시에 열린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에서 대공처장 이학봉이 예비검속을 실시해 체포를 개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진행됐다.(제5공화국 전사, 보안사 1982) 회의 직후 광주에서는 505보안대에 의해 22명이 잡혀 갔다.)
정작 핵심인 보안목표 109곳에는 불과 2,385명만이 배치된 반면 나머지는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 병력의 93%인 2만2천3백4십2명이나 배치됐다.
서울-
강북: 15개 대학에 계엄군 10,912명, 장갑차 39대 배치.
강남: 3개 대학에 계엄군 1,999명, 장갑차 20대 배치.
경기-
4개 대학에 계엄군 1,382명, 장갑차 21대 배치.
강원-
11개 대학에 계엄군 847명, 전차 3대, 장갑차 7대 배치.
충청-
8개 대학에 계엄군 1,019명 배치. (2군 3관구)
경상-
경북: 9개 대학에 계엄군 2,102명, 장갑차 2대 배치. (2군 5관구)
경남: 12개 대학에 계엄군 2,250명, 장갑차 2대 배치. (2군 2관구)
전라-
4개 대학에 계엄군 1,953명 배치. (전교사)
충청과 호남지역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날짜보다 훨씬 이전인 5월 10일 오후 2시 56분에 2군에서 전교사에 명령을 하달해 전북대에 7공수여단 32대대, 충남대에는 7공수 31대대, 전남대와 광주교대에는 7공수 33대대, 조선대와 전남의대에는 7공수 35대대를 배치하도록 계획했다. 이미 7공수 여단은 충정훈련을 매일 실시했다. - 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5.10 (실제로는 전북대에는 31대대가, 충남대에는 32대대가 서로 바뀌어 배치됐다.)
5월14일에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투입되어 전일방송, KBS, MBC, CBS 등 방송국과 주요 시설물에 31사단이 배치됐으며(작전상황일지, 31사단 1980.5.13~5.28), 전교사는 5월14일에 5.18 00:00 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실시될 충정작전(화려한 휴가)에 대비해서 주요 목표물을 파악하도록 31사단과 35사단에 명령을 내렸다(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5.14)
5월15일부터 5월 17일까지 전교사에서 트럭 29대, 3관구사령부(대전)에서 트럭 19대, 35사단에서 트럭 18대가 금마에 위치한 7공수 여단에 도착했다.
계엄령 전국확대를 다룰 국무회의가 아에 열리지도 않은 5월17일 오후 5시에 2군사령부는 "충정작전 유효, 5.18. 00:01를 기해 불순분자를 체포, 5.18. 04:00 이전 주요 학교 점령"(군 사령관 구두 지시) 명령을 내리고, 학교 점령시간 변동지시(04시에서 02시로 변경)를 하달했다.(육본 작상전 414호)
전북대는 5월18일 새벽1시5분, 충남대는 새벽1시25분, 전남대와 광주교대는 새벽2시, 조선대는 새벽2시30분에 계엄군에게 점거당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 오후 1시 이후에야 전남대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거리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에는 광주지역 대학생들이 도청에 모여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울지역 대학들이 신현확의 자유 대선과 총선실시를 약속한 특별담화를 믿고 5월 15일 밤을 기해 수업으로 복귀한다는 결의를 내린데 반해,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5월 16일 3만여명이 모여 횃불 시위를 전개해 5.16 화형식을 끝낸 후 시위현장 길거리 청소를 실시하고는 며칠간은 사태를 관망하며 쉬고 5월 19일에 다시 결의대회를 열자며 시위를 마감했다.
호남지역 대학들을 점거한 7공수 여단은 교내에서 학생들 79명을 잡아갔다. (그중 전북대에서는 학생이 연행을 피하려다 실족했다. 전투상보- 7공수 여단 1980) 전교사 전투상보 기록에는 169명으로 더 많은 연행자 숫자가 적혀 있다.
5월 18일 확대 계엄령 포고와 강제 휴교 사실을 모르던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에서 출입통제 당하자 도서관 이용 등을 내세우며 항의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확대계엄령이 발동되면 오전 10시에 정문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한 학생들이 약속장소에 나타나면서 200여명으로 항의학생 숫자가 늘어 났다.
계엄군은 학생들의 항의가 지속되자 2개 지대를 정문에 더 배치했고, 학생들은 병력증강에 분노해 일부는 돌을 집어들어 던지기도 했다.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무력진압에 나서 인근 주택과 상가는 물론 시내버스 안까지 뒤지고 다니며 젊기만 하면 아무나 걸리는대로 무작정 곤봉으로 때려 기세를 꺾어 놓고 봤다.
"초동단계에 신속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해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 한다"-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 보안사 정보처 1979
이에 따라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218,60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3) 가생이 08-20 256655
공지 정게 운영원칙 Ver.2018.03.27 (1) 객님 12-03 832811
25277 시위대한테 죽은 민간인들도 꽤 된다고 하는데 자료를 … (3) 기억의습작 03-20 784
25276 5.18 총기 선빵 누구?? (6) 귀괴괵 03-20 1089
25275 2020 올림픽 개최 도쿄 퇴출' 세계네티즌 서명 운동 (2) whity 03-20 974
25274 잠금 (11) 뻑이가요 03-20 162
25273 시위와 상관없는 민간인 사망 (13) 기억의습작 03-20 1115
25272 시위대가 특공대를 쓸어버렸다고 주장하시는 어떤분 (13) 기억의습작 03-20 743
25271 진상규명회 5.18 글중 발췌 (5) 귀괴괵 03-20 768
25270 5.18에 대해 너무 모르시는 분들 많네.. ㅎ (29) 귀한집아들 03-20 1039
25269 교육의 중요성 함해보삼 03-20 819
25268 . (15) 하늘2 03-20 171
25267 인터넷에서 자료찾느니 요런거 몇권읽어보는게 확실한… (5) 귀괴괵 03-20 881
25266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5.18기록 귀괴괵 03-20 956
25265 기억님 그럼 이명박은 독재가 아니죠? (34) 소모보 03-20 885
25264 기억님 그럼 저도 물타기 해보죠. (24) 소모보 03-20 868
25263 세계 부정부패 톱10개 국가 (6) 함해보삼 03-20 5231
25262 자 그럼 예를 다시 들어드리죠 (20) 기억의습작 03-20 846
25261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21) 기억의습작 03-20 761
25260 네이버에서 복사로 퍼온글입니다.(광주 관련) (27) 애드온 03-20 877
25259 北 "통합진보당 박해·탄압…용납할 수 없는 망동" (6) exercisead 03-20 932
25258 5.18 (2) (1) 귀괴괵 03-20 1416
25257 피콜로더듬이님 보세요 부자감세글 다시 올려드립니다. (1) 기억의습작 03-20 751
25256 518 진행 과정 살펴봅시다. (6) ㅎㄴㅇㄹㅇ 03-20 1360
25255 . (5) 하늘2 03-20 109
25254 5.18 (1) 귀괴괵 03-20 2698
25253 하늘2봐라 5월 27일 이전에도 탱크가 있었다 (7) 메탈 03-20 919
 <  7731  7732  7733  7734  7735  7736  7737  7738  7739  77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