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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3-20 13:08
5.18 (2)
 글쓴이 : 귀괴괵
조회 : 1,416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도 시민들을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가해 충격적인 폭력을 휘두를 준비를 이미 충정훈련을 통해 마친 상태였다. 각 공수여단은 80년 2월부터 정규 훈련을 거의 포기한채 시위대와 진압군으로 역할을 나눠 오직 시위진압 충정훈련만 했으며, 그 강도는 기존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
교문 앞에서 강제 해산당한 학생들은 화를 삭히지 못해 도청으로 향했고, 이동 중에 저지하려는 경찰 진압대와 동구 카톨릭센터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시내 시위 발생을 확인한 계엄군은 오후 3시 40분에 7공수 33대대와 35대대를 투입시켜 오후 4시에 금남로와 충장로에 도착해 진압작전대형을 갖췄다.
5월18일 오후 3시에 수도경비사령부는 서울 동국대를 점거하고 있던 11공수여단에 명령을 내려 1개 대대는 수송기로, 여단은 열차를 이용해 광주에 내려가 2군 작전통제하에서 광주시위를 진압하라고 했다. 기다렸다는듯 11공수여단은 불과 명령을 받은지 43분만에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육본 작전명령 19-80호, - 전투상보, 11공수여단) 11공수여단은 다음 날인 19일 새벽 3시에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 11공수여단은 4월 초에 발생했던 사북탄광 노동자 생존권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1군 사령부 명령에 의해 출동할 뻔 하기도 했다.)
오후 2시 30분에 광주에서는 31사단과 7공수가 참석한 시내 시위 진압출동 회의가 시작됐는데, 서울에서는 오후 3시에 지리상 가까운 충남이나 경남도 아닌 서울에서 그 것도 수송기를 이용해서 급하게 광주로 11공수여단마저 출동시켰다는 사실은 광주시민 학살이 아에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오후 4시에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이미 진압대형을 갖춘 7공수여단은 진압작전 전개 30분만에 103명을 연행하고, 저녁 7시까지 173명을 추가 연행했다.

당시 진압작전은 충정계획에 따라 시위대 해산이 아에 배제된 철저한 체포위주의 작전이었기에 물리적 진압은 더욱 강경할 수 밖에 없었고, 당연히 민간인 피해는 더 클 수 밖에 없었다.다음날 5월 19일에는 더 강화되어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도록 했다. -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 2군 사령부 1980.5.19
<진압대와 시위대의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 간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사진 아래로는 뻔뻔한 전두환의 진급사진과 멍한 체육관 대통령 선서 모습>
반면에 시위진압시 진압대와 시위대 모두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시키며 시위진압을 지시했던 전남도경국장 안병하는 오히려 5월27일 진압이 완료되자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합수부로 끌려가 직무유기 혐의로 수사를 받아야 했다. 자발적인 사직 형식으로 물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 합수조치내용, 전남합수단 (당시 합수부로 끌려가는 인물들은 전두환의 분류 허락이 있어야 했다.)
5월 19일 새벽 1시 50분부터는 골목길 가택수색 작전을 통해 자기 집에서 자고 있던 젊은이들마저 닥치는대로 끌고 갔다. - 충정병력 출동 및 광주사태 상황일지, 특전사령부 1980.5.19
5월 20일부터는 2군사령관은 훈시를 통해 계엄군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하면서 시위자들을 아에 이적행위자라고 발언하여 적군으로 규정했다.
21일에는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여러 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해..."라고 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불순분자와 고정간첩들의 소행으로 규정해 버렸다.
공수부대 계엄군에 의한 첫 희생 사망자는 5월 18일에 나왔다.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김경철은 식당에서 점식을 먹고 귀가하던 중 온몸을 구타당해 숨졌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후두부타박에 의한 뇌출혈이었다.
시민 여론 동향 파악임무를 하던 보안사 조차도 "시민들이 소요시 계엄군이 너무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느냐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는 보고에도 진압작전은 악랄하게 진행됐다. - 광주사태 상황보고, 보안사 1980
따라서 시민들과 학생들의 분노도 더 커져갔고, 대응하는 시위방식도 점점 과격해져 갔다. 급기야 5월 19일 오전 11시에는 계엄군이 탱크 2대를 투입하고, 10분 후에는 장갑차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며 추격해 체포했다.
<피로 물든 대검, 5월19일 착검한 공수부대원들과 화염방사기를 매고 전진하는 공수부대 병사>
<착검진압과 화염방사기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기자였던 신복진, 지금도 너무 유명한 사진작가다.>
공수부대 계엄군은 이미 5월 19일부터 대검을 사용해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7공수대 총검진압" - 작전상황일지, 전교사.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민주화 운동 현장 사진에도 7공수여단 서 모 중사가 착검을 한 채 시위대원을 쫓아가는 장면이 있다.(당시 서 모 중사는 현재까지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1980년 광주지검 검시조서에도 11명이 칼에 의해 사망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 중에서 주남마을 공수부대 버스총격 사건을 보면 사살부터 부검소 이송까지 공수부대원에 의해 모두 관리된 상황으로 한 젊은 여성은 부검결과 좌측 유방에서 대검 자상이 발견됐다.
5월 22일에는 전교사 연병장으로 헬기로 끌려가 내리던 연행자를 술에 취한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귀 뒷부분을 찌르는 것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준장 김순현과 작전참모 대령 백남이 등이 목격하고서는 그 부상자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사망했다.

2. 누가 먼저 총을 발포했나?
(사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과 여기에 답변을 달아야 하는 것은 유치하기까지 하다. 상식적으로 쿠데타 세력의 권력 장악에 동원된 반란군이 총을 들고 있다면 당연히 또다른 반란 세력을 거부하는 비무장 국민들도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 저항 혹은 대항 혹은 진압하기 위해 총을 들게 되어 있다. 누가 먼저 쏘았느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트집잡기식 문제제기일 뿐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위에서 길게 인용하거나 쓰면서 적어 왔다.
이미 광주시민들은 처음부터 반역도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79년 김영삼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부산마산 민주화 투쟁이 시범적으로 공수부대 계엄군에게 진압당해 성과의 표본이 되었듯이 80년에는 광주가 전두환에 의해 공수부대 계엄군에게 시범적으로 진압당해야만 했던 희생자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요직을 차지한 전두환 반란세력에게 80년 서울의 봄은 절대로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국무총리 신현확이 발표한대로 정치일정이 그대로 진행되어 자유로운 직접 비밀선거로 대선과 총선 실시가 이뤄지면 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정권이 탄생함으로써 12.12 반란을 일으켰던 전두환 세력들의 몰락과 체포는 뻔했기에 아에 짧은 시기에 국민 대부분이 포함된 거대한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속전속결로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두환의 충정작전은 화려한 휴가를 전국으로 떠났고, 광주에서는 피의 살육제를 즐겼던 것이다.
반대로 그만큼 대한민국 민주발전과 미래를 위해서는 전두환 반란세력을 먼저 퇴진시켜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은 너무나 현명하게 알고 있었고, 광주시민들은 그 것을 실천하는 뜨거운 용기와 강렬한 투쟁을 보여 주었다.
<전두환 퇴진, 민주화 회복에 동참한 고교생들.>
<고등학생 여러분
역사의 흐름은 젊은 고교생들의 적극적인 민주화 운동 참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의거 등은 광주 고교생이 선구로 일어난
신성하고 거룩한 운동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자랑스런 후배들인 것입니다.
타오르는 눈빛의 젊은 고교생들이여!
칠판을 바라보고 공부하는 것만이 학생의 본분은 아닙니다.
여러 분은 천인공노할 살인마 전두환의 만행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 분들의 부모형제 동생들이 그들의 흉체한 총살에 쓰러진 것을
그대로 방관만 할 것입니까.
여러 분 조국의 민주화는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몫도 아닙니다.
그 것은 피를 마시고 사는 흡혈귀와 같아서 숭고한 피의 댓가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선혈을 뿌린 학생들의 진정한 듯을 깨닫고
참다운 삶의 가치관을 냉철히 판단하여
조국의 민주화가 이룩 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합시다.>
광주에서 최초의 총격은 5월 19일 오후 4시 50분에 계림동 큰 길인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계엄군이 발포함으로써 발생했다.계엄군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대위 차 모가 발포해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이 쓰러졌다. - 5.18 사건 수사기록, 조창구 2회 피의자 심문조서, 서울지검.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보안사 1980. 5. 20. 01:00 (대령 조창구는 11여단 63대대장으로 차 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반면에 505보안부대는 무성권총으로 시위대에 숨어 있던 특정 세력이 사격해서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했다는 거짓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는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파악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권총 사격이면 더욱 더 파편이 많을 수가 없으며, 파편이 많은 산탄총이라면 당시로써는 소음기를 달 수 없다. 505보안부대 보고서를 제외하면 그 어떤 진압군 각 부대 보고서에도 발포사실을 아에 기록하지 않고 은폐했다.
계엄군의 다음 발포는 5월20일 밤부터 이뤄졌다.20일 밤 3공수여단 본부중대 병력들이 전남대에서 탄약을 실고 광주역으로 지원 나가는 과정에서 막아 선 시위대를 향해 총기 사격을 했다. - 3공수여단 본부중대 하사 이 모, 한겨레신문 2006. 5. 18 이 때 2명의 시민이 3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20일밤 9시 50분경에 광주역에서 3공수 16대대 중사 정관철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사망하자 3공수 여단장 최세창이 실탄을 장전하도록 지시했다. -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보안사 1980. 5. 20 22:27
반면 정작 3공수 여단은 5월 20일 밤부터 5월 21일 새벽까지의 상황에서 화염방사기, M203(유탄발사기)를 사용해 시위대를 제지했다면서도 발포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 전투상보,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 3공수여단 1980
3공수 여단 본부중대원들은 광주역 계엄군에 실탄을 공급한 후 전남대로의 철수 과정에서 방망이, 망치, 대검을 사용해 머리를 때리거나 찔러 시위대를 또 살해했다. -광주사태 검시결과 참여 보고서, 보안사 505부대 1980
31사단에서는 20일 밤 11시 4분에 연발총성을 듣고는 발포 사실을 파악했다고 적고 있다. 11시 20분에는 시청 옥상의 공수부대가 예광탄 사격을 했고, 11시 30분에는 계림동 파출소 쪽에서 3,4발씩 발포 소리가 나고 11시 35분에는 사격이 중단된채 군가 소리가 들려 왔다고 되어 있다. - 광주사태시 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
이에 2군 사령부는 3공수 발포 이후 5월20일 밤 10시 30분에 작전지침 추가하달(작상전 444호)을 통해 "발포 금지와 실탄 통제, 특전사 부대 임무 20사에 인계 검토, 특전사 부대 대대 단위로 분산 집결, 선무공작을 위한 홍보활동 강화"를 지시했다. 곧이어 작상전 445호를 통해 광주시 외곽 교통로를 봉쇄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명령은 일부에서 지켜지지 않아 11공수여단 예하 61, 62, 63 대대는 실탄을 계속 분배했다.)
이 의미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서 21일 오후부터 외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이미 20일 밤 10시 30분에 내려진 명령과 직후 곧바로 내려진 명령에 의해 계획에 따라 이동했음을 보여 준다. 즉 부산마산 민주화투쟁에서 효과를 보았던 초기 강경진압이 먹혀들지 않자 이제는 선무공작과 홍보활동 강화로 진압작전을 일시 바꿨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완전 무력진압을 위해 준비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5월 21일 새벽4시 30분 계엄사 대책회의에서는 명분으로 삼을 자위권 발동문제를 다뤘는데, 그 날 전두환과 이희성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 -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2군사령부(사령관 진종채 친필기록), (이희성이 주장했다는 내용은) - 제5공화국 전사, 보안사
자위권 발동은 국방부 장관실에서 이희성(계엄사령관), 주영복(국방부 장관), 김종곤(해군참모총장), 윤자중(공군참모총장), 유병헌(합참의장), 진종채(2군사령관), 백석주(연합사부사령관), 정도영(보안사 보안처장)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21일 오후 4시 30분에 결정됐다. - 5.18 수사기록, 이희성 피의자 4회 심문조서, 서울지검
이처럼 국민에게 본격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중대한 문제를 국무회의나 대통령의 결단없이 그저 전두환 반락세력들이 자기들 맘대로 밀실에서 결정해 버린 것이다.
3공수여단에게 죽임을 당한 2구의 사체가 5월 21일 새벽 도청 근처에 도착했다. 아침 7시에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 35대대가 추가로 도청 진압 계엄군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아침 8시부터 추모제를 펼치며 도지사 면담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전 9시에는 시위대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3대와 그 밖의 버스 몇대를 몰고 나왔다. 이 장갑차 3대 탈취가 사실상 최초의 광주시내 시민들이 행사한 자위권을 위한 군사무기체계 무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아세아자동차가 지금은 현대기아로 넘어 갔기에 지금의 기아자동차 생산공장 위치가 아마 맞을 것이다. 어쨌든 아세아자동차가 있던 곳은 광천동 오밀조밀한 공장지대였으며 지금의 광주터미널과 신세계 백화점 부근이다. 이 공장이 당시에도 시내에 바로 붙어 있었다라고 알고 있다.)
계엄군은 도청 공간을 장악유지하기 위해 시위대 저지선을 도청 분수대를 기준으로 300m 떨어진 지점에다 두고 있었다(11공수여단 63대대 정보장교 장 모, 5.18 수사기록 장 모 2회 진술조서). 한편 도청 수산국장실에서는 도지사와의 면담을 통해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에 대한 공개사과, 연행 학생과 시민석방, 정오 12시까지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하고 있었다.
장갑차를 앞세운 시위대가 돌진하자 계엄군은 최류탄을 쏘며 저지하다 도청 분수대에서 100여m 떨어진 광주경찰서 앞 4거리까지 밀려났다. 밀려난 공수부대와 자리를 교대한 11공수여단 63대대는 실탄을 장전하기 시작했다.(11공수여단 63대대 정보장교 장 모, 5.18 수사기록 장 모 2회 진술조서, 서울지검)
이 때가 계엄군이 최초로 실탄을 장전한 것이 아니라, 이미 5월 19일과 20일에 시위대에게 발포를 했다가 20일 밤 10시 30분에 작전명령(작상전 444호) 추가하달에 따라 총기에서 탄창을 제거했다가 다시 장전한 것이다.
이후 11공수여단은 하사관들까지 실탄을 장전한 상황에서 61대대장 안부응은 발포를 주장했고, 62대대장 이제원은 반대했다.(5.18. 수사기록, 각각 이제원 피의자 심문조서와 안부응 3회 피의자 신문서, 서울지검)
오전 11시경 전남도지사가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가 정오 12시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방송했지만 정오 12시까지 공수부대는 철수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시민군의 장갑차가 공수부대 병력을 여기저기서 밀어내려고 애쓰자 뒤로 밀려나던 계엄군은 최종 저지선을 도청 분수대에서 5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일빌딩과 YMCA건물로 삼았다. (일병 이 모,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8중대 2006.3.21)
전남도지사가 발표한 공수부대 철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정오 12시 55분 쯤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이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 표면에서 터져 불이 붙어 뒤로 빠지면서 생긴 빈 공간으로 시민군의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가면서 계엄군 전열이 무너지게 된다. 혼란 중에 계엄군이 우왕좌왕 하면서도 전방에 있던 11공수의 61대대와 62대대는 모두 시민군 장갑차를 피했지만 후방에 있던 63대대 8지역대 무전병 일병 권용운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시민군의 장갑차 치여 사망했다.
사람을 치자 잠시 머뭇거리던 장갑차에 일시에 계엄군의 사격이 집중됐고, 순식간이라 여전히 뒤따라 들어오던 버스에도 총격이 가해졌다. 버스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버스는 도청 분수대를 들이 받으며 멈춰섰다. 이런 총격 속에서도 광주시민들은 흩어지지 않고 도청으로 행진했다.
(그 시각 공교롭게도 애국가 방송이 울려 퍼졌는데 이 것은 전남도청 내무국장이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틀었다고 한다. - 5.18사태 주요 사건일지, 전라남도, 보안사 383-1980-97)
이러한 시민들의 기세에 놀란 계엄군은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고, 등 뒤로도 사격이 가해졌다. 심지어 총격으로 쓰러진 시민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마저 총격을 가하며 도청광장을 사수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대를 무력화 시킨 계엄군은, 11공수여단 61,63대대는 분수대 바로 앞 상무관 쪽으로, 62대대는 수협 쪽으로,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쪽으로 재집결하여 주변 건물에 저격수들을 배치하여 다시 도청을 향하는 시위대나 차량에 정확히 조준 사격을 가했다. 도청 외곽인 금남로 진입길인 노동청 쪽에서는 진압군 장갑차가 배치되어 장갑차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 경에는 태극기를 들고 시민군 장갑차에 올라 도청을 향해 가다가 관광호텔 앞에서 계엄군의 사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시민군의 최초 발포는 21일 오후 1시 30분경 도청 앞에서 쏜 권총 발사였다고 전두환 반란세력의 기록은 적고 있지만 거짓임이 드러났다.
시위대가 쏜 권총에 맞아 11공수여단 61대대 3지역대 8중대 하사 권용운이 사망하고, 다른 2명이 중태에 빠져 국군통합병원으로 헬기 수송됐다고 적어 놓고 있다.(광주사태시 전교사 정보처일지(전교사), 7공수 35대대 상황일지(김일옥), 광주사태(육군본부), 전교사 작전일지(전교사), 충정병력 출동 및 광주사태 상황일지(특전사)) 이들은 동일 사건을 가지고 각각 다른 목소리로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 무기는 권총이었다고 하고 있으며, 특전사는 권총이 아닌 사냥용 엽총도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전두환 반란세력은 21일 오후 1시경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학살할 때, 시위대도 1시 30분경에 계엄군에게 권총을 발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계엄군이 공식 발표한 사상자 명단 기록에는 시민군이 쏜 권총에 맞아 계엄군이 숨졌다는 주장과 다르게 5월 21일 도청 앞 계엄군의 시민 학살사격 때 시민군이 쏜 총에 맞아 총상을 당한 계엄군 부상자나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거짓임이 밝혀졌다.
계엄군의 각 기록에 의하면, 광주에서 시민군이 최초로 총기를 소유한 때는 5월 21일 새벽 3시로 광주세무서 방화 전에 직장 무기고에서 캘빈 17정을 가져 갔으나 실탄은 없었다. 오전 7시 30분경 광주에 진입하던 20사단 60연대에게서 군용차량 14대와 M60기관총 3정, 무전기 10여대를 탈취했으며, 오전 8시 나주군 반남지서에서 캘빈 3정과 실탄 270발을 탈취했다.(방화는 광주 MBC와 KBS, 광주 세무서 3건이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유일하다.)
오전 9시경 나주군 남평지서에서는 총기와 실탄을 탈취하려다 (김유범) 체포됐다. -상황일지, 전남도경 1980
계엄군 기록에 의하면 오후 1시경 부터 시작해서 광산군 하남, 화순 본서와 광업소, 나주 본서와 남평 신포 금성 예비군 무기고, 영광 파출소 등에서 오후 내내 총기 탈취가 이뤄 졌다. (아무리 대부분의 인원이 광주 시위진압에 동원됐다고 해도 너무 허술하게 탈취당했다. 아마도 심정적 동조로 방치하지 않았다면 현실적으로 탈취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초로 보고된 무기의 광주 등장은 21일 '오후 2시 30분에 학동시장 앞에서 화순 광업소에서 가져온 TNT가 목격되었고, 공포탄 사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보안사 (이후 TNT 뇌관 2,300개는 학생 4명 이경식(이후 사망자 문용동), 양 모, 박 모, 김 모에 의해 제거되어 전남북계엄분소에 반납됐다. 또한 이후 수류탄도 분리 되어 폐기됐다.)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무장한 오후 4시 경부터 대응 맞사격이 이뤄졌고, 계엄군은 21일 오후 3시 35분 내려진 이희성의 작상전 455호 명령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해 광주 봉쇄 작전으로 변경해 돌입했다. 이 때부터는 광주 외곽 군민들이 분풀이로 쏘아 대는 계엄군의 사격에 아무 이유없이 희생당하는 시기로 접어 든다.
이후 광주 민주화 운동은 5월 23일부터 준비에 나선 상무충정작전에 의해 27일 도청 현장에서의 민주화운동만큼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전두환 쿠데타 반란군의 지시를 받은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시신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눈물>
 
길어서 짤렸네,..... 이어붙이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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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온 13-03-20 13:10
   
사진들이 다들 액박이요....
액박만 아님 좋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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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77 시위대한테 죽은 민간인들도 꽤 된다고 하는데 자료를 … (3) 기억의습작 03-20 784
25276 5.18 총기 선빵 누구?? (6) 귀괴괵 03-20 1090
25275 2020 올림픽 개최 도쿄 퇴출' 세계네티즌 서명 운동 (2) whity 03-20 974
25274 잠금 (11) 뻑이가요 03-20 162
25273 시위와 상관없는 민간인 사망 (13) 기억의습작 03-20 1115
25272 시위대가 특공대를 쓸어버렸다고 주장하시는 어떤분 (13) 기억의습작 03-20 743
25271 진상규명회 5.18 글중 발췌 (5) 귀괴괵 03-20 769
25270 5.18에 대해 너무 모르시는 분들 많네.. ㅎ (29) 귀한집아들 03-20 1039
25269 교육의 중요성 함해보삼 03-20 819
25268 . (15) 하늘2 03-20 171
25267 인터넷에서 자료찾느니 요런거 몇권읽어보는게 확실한… (5) 귀괴괵 03-20 881
25266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5.18기록 귀괴괵 03-20 957
25265 기억님 그럼 이명박은 독재가 아니죠? (34) 소모보 03-20 885
25264 기억님 그럼 저도 물타기 해보죠. (24) 소모보 03-20 868
25263 세계 부정부패 톱10개 국가 (6) 함해보삼 03-20 5231
25262 자 그럼 예를 다시 들어드리죠 (20) 기억의습작 03-20 846
25261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21) 기억의습작 03-20 761
25260 네이버에서 복사로 퍼온글입니다.(광주 관련) (27) 애드온 03-20 877
25259 北 "통합진보당 박해·탄압…용납할 수 없는 망동" (6) exercisead 03-20 932
25258 5.18 (2) (1) 귀괴괵 03-20 1417
25257 피콜로더듬이님 보세요 부자감세글 다시 올려드립니다. (1) 기억의습작 03-20 751
25256 518 진행 과정 살펴봅시다. (6) ㅎㄴㅇㄹㅇ 03-20 1360
25255 . (5) 하늘2 03-20 109
25254 5.18 (1) 귀괴괵 03-20 2698
25253 하늘2봐라 5월 27일 이전에도 탱크가 있었다 (7) 메탈 03-20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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