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특정 회원에 대한 반말,욕설 글(운영원칙 2,3항) 3회 위반시 접근 차단 조치 됩니다.(원인제공과 관계없이 조치)
하오니, 절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거법 위반 및 정치관계법 위반행위 신고는 아래 중앙선거관리 위원회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http://www.nec.go.kr
HOME > 커뮤니티 > 정치 게시판
 
작성일 : 13-03-01 21:25
마지막...
 글쓴이 : 루비아이
조회 : 1,177  

. 박정희대통령이 독립군 토벌했다는 건 전부 유언비어
(독립군 장군 증언)
독립군 김학규 장군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
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열하성(熱河省)에 있는 만주군 보병 8단 부관(중위)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광복직후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 3지대 ‘평진대대’에 합류했다. 그때 제3지대장이 김학규 장군이었고, 박정희는 제2중대장이었다.
김학규 장군은 열병 등의 신병으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8년 4월16일 영국 상선편으로 귀국했다. 김 장군은 곧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한독당(韓獨黨) 조직부장에 취임한다. 1949년 6월26일 현역군인이던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저격하자, 안두희의 한독당 입당을 주선했던 김 장군은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김학규 장군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수감된 김 장군은 4·19 직후 풀려나 1960년 한독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한다.
1961년 5·16 이후 박정희는 옛 상사였던 김학규 장군을 보살폈다. 김 장군을 복권시키고,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토록 했다고 한다.

원로 한국학자인 최서면(崔書勉·78·일본거주)씨는 “김학규 장군이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 대통령이 내게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라’고 부탁해 내가 그 분을 등에 없고 가서 국군 병원에 입원시켜 드렸다”면서 “김학규 장군은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광복군 3지대 ‘평진 대대’ 대대장이었던 신현준(申鉉俊·88·미국 거주) 전 해병대 사령관은 “내 아래에서 중대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학규 장군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예전 상관을 깍듯하게 모셨다”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세상을 ‘친일이다, 아니다’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알게 된다”고 했다.
1967년 9월20일 김 장군이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했다. >>
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대토벌 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 2개 대대가 참가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와 같이 8단에 근무했던 조선인 선배들 역시 그가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신현준 상위, 방원철 중위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가 8단으로 부임해 가보니 박정희는 이미 나보다 한 달 전에 단장 부관으로 와 있었다. 그가 맡은 것은 중요한 직책인 것 같았다. 박은 부관이니까 일선부대에 나가는 일은 없었으나 나는 중대장이니까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전투를 했다. 8단 시절 나는 일선 지휘관이어서 그를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여러 번 만났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야무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신현준씨 증언)
"나는 소규모 전투를 포함, 10여 차례 (팔로군 토벌)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연대 을종부관으로 있어서 전투경험이 전연 없다. 나는 (지휘관이다보니) 중국인 사병들과 어울리면서 중국말도 배웠으나 박정희는 그럴 기회가 없어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8단 시절 박정희는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 그는 비교적 편히 지냈다."(방원철씨 증언)




무식한 놈들이 오마이 뉴스에 세뇌되서 제대로 모르면서 헛소리를 하는구나. 박정희가 활동할 당시에 만주에 무슨 독립군이 있었냐? 박정희가 1944년 7월에 북경 동북부 15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熱河省 興隆縣 半壁山)에 주둔한 만주군 제8단(8연대)의 소위로 근무할 당시에 그 지역에 독립군은 없었다. 조선의용군은 화북에 있었고,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가 이끌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지청천(池靑天)이 이끌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김좌진(金佐鎭)이 이끌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같은 만주의 독립군들은 규합했으나 1921년 흑하 사변 후에 러시아 적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된 후에 포로가 되었는데 지청천 만이 만주로 탈출했다.

지청천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2년 후인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총참모장으로써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의 압력으로 재만 독립군들은 만리장성의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했고, 1940년에 중국의 내륙 도시인 중경(重慶)으로 피신해 광복군(光復軍)을 결성했다. 김원봉은 광복군의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고, 중경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41년 1월에 창설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회장인 김무정(金武亭)을 통해 1941년 7월에 박효삼(朴孝三)을 지대장으로 임명해 재편성함으로써 조선의용대와 분리되어 일제 군대와 전투했으나 대한민국의 독립이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실현을 위해 싸웠다.

조선의용군의 활동 지역은 박정희가 소속한 만군 제8단의 주둔지와는 크게 떨어진 북경 서남부 380km 지점에 위치한 하북성 한단시의 태항산(河北省 邯鄲市 太行山)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모체는 1938년 중국의 한구(漢口)에서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의 화북지대(朝鮮義勇隊 華北支隊)였다. 화북지대의 본부는 팔로군 총사령부가 소재한 태항산(太行山)의 요현 마전(遼縣 痲田)에 있었다. 1942년 7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바꾸고, 1944년 초에 조선의용군으로 개명한 장소도 중국 산서성(陝西省)의 북부 황하(黃河) 유역에 있는 연안(延安)이었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간과한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은 설득력이 없다.

열하(熱河) 지방의 항일투쟁 지도자는 ‘병비(兵匪)’로 유명한 구동북군(舊東北軍) 출신의 탕옥린(湯玉麟)이 중국 국민당정부(中國國民黨政府)와 연계해 활동했지만 1941년에 자취를 감추었다. 박정희가 만주군 제8단으로 근무했던 시점은 이보다 한참 후인 1944년 3월로써 독립군이 만주에서 철수한지 3년이나 경과한 시간이었다. 1945년 8월까지 1년 5개월간의 짧은 근무기간이었다. 항일 유격전을 벌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설도 시차를 간과한 무지에서 기인한 주장이다.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일만군경의 동남부 치안숙정공작에 따른 참빗작전으로 동남3성(東南3省 = 길림吉林, 통화通化, 간도間島)에서 활동하던 약 3천 명에 달하는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이 전멸되었다. 1940년 2월 23일 제1로군 총사령관인 양정우(楊靖宇)가 전사했다. 1940년 12월 말에 동북항일연군의 패잔병 20여명은 소련원동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만주에서 항일투쟁이 없었다.

물론 박정희가 학도병으로 강제징용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독립군 토벌설은 사실이 아니다.

2. 박정희의 친일 행위의 오류와 자발적 창씨개명의 오류


반민특위와 광복회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행위자로 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민특위에서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했는데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을 선정했으나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http://www.kla815.or.kr/)
이렇게 박정희는 이미 독립운동가와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행위자에 포함되지 않든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친일행위라는 것은 독립운동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한 일제 공안기관의 관련자들만 문제삼아 단죄하는 경우가 일반적 입니다. 만주군의 중위 정도는 현저한 친일 행위로 판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박정희는 친일행위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김대중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로 창씨개명했고, 김영삼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로 창씨개명을 했지만 김대중은 만 13세, 김영삼은 만 12세의 어린 나이에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안되고 박정희는 성인 나이에서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자발적인 창씨개명으로써 문제가 된다고 왜곡하지만 이런 주장은 논리적 오류입니다.
박정희가 만 22세이던 당시 1939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218,60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3) 가생이 08-20 257065
공지 정게 운영원칙 Ver.2018.03.27 (1) 객님 12-03 833262
24127 뉴라이트에 대한 거짓선동 (17) Noname 03-02 1328
24126 친일 뉴라이트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블로그 내용들 … (3) 핫식스 03-02 909
24125 제가 글을 안쓰는 이유/? (15) 류효영 03-02 664
24124 교사가 전교조라 공부 안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2) 류효영 03-02 1193
24123 5.18 폭동설 종결.swf (9) plum™ 03-02 1030
24122 김구가 테러리스트? (16) Noname 03-01 1488
24121 잠금 (6) 뻑이가요 03-01 235
24120 박정희이야기에 지장천 장군 장준하 선생을 거론 하는건… (6) 돌맹이 03-01 885
24119 징모과라는 게 신경군관학교에 존재했다? (34) Noname 03-01 955
24118 애초에 웃긴게 진짜 친일파를 까고 싶으면 (17) 장인2 03-01 728
24117 백선엽이 공격 받는 이유 (10) Noname 03-01 2866
24116 친일파. 빨갱이. 독재자. (1) zxczxc 03-01 968
24115 김대중 대통령의 최대업적 (18) 20세기폭소 03-01 1313
24114 적극적 친일 행위? (4) 돌맹이 03-01 979
24113 3.1운동은 분명 한계가있는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5) 박선생 03-01 1293
24112 마지막... 루비아이 03-01 1178
24111 박정희 친일파 반박자료들 루비아이 03-01 1569
24110 혈서 반박자료 보여드릴게요... 루비아이 03-01 1281
24109 박정희가 독립군모가지딸각오하고 혈서쓰고 일본군에 … (28) 공자 03-01 1285
24108 저격) 3.1 운동은 폭동이다 !!!!!! (22) 밀프리먼 03-01 1052
24107 변희재 김종훈vs안철수 비교 (9) 백발마귀 03-01 1005
24106 통일후 북한의 취급에 대해 (6) 트러블이당 03-01 853
24105 3.1 운동은 폭동이다 !!!!!! (15) 호이짜 03-01 1621
24104 박지원 이야기 나와서 백발마귀 03-01 843
24103 . (7) 낙엽 03-01 162
 <  7771  7772  7773  7774  7775  7776  7777  7778  7779  77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