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권력이 세습 독재 체제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북한 체제의 기반에는 전통적인 권위주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고, 독재 체제의 변화는 이러한 문화의 변화와 함께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외부의 위협을 제거해야만 문화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은 남한에서 민주주의와 복지 국가를 뿌리내리게 하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북한 체제의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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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 윌리 톰슨은 1980~1990년대의 북한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 정권은 크메르루주의 사이코패스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모델로 삼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북한의 국경에서 가하고 있는 고도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때문에 북한은 국가 방위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또, 그 최고 지도자 김일성의 과대망상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북한에 비하면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오히려 느슨하고 자유롭게 보였다.”(<20세기 이데올로기> 481쪽)
인용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톰슨의 주장을 보다 큰 틀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네 가지로 풀이된다.
첫째, 톰슨은 북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융합적인 것으로 보았다. 권위주의를 기반으로 파시즘, 민족주의, 공산주의가 결합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북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주체사상’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사상적 혼합물이다.
둘째,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한 비교사적 인식도 흥미롭다. 크메르루주와 현대 중국 사회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고, 톰슨은 판단했다. 파시즘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평가로 볼 수 있다.
셋째, 북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 외부적 원인을, 톰슨은 미국의 책임으로 이해했다.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의 군사적 압박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대체로 우리는 북한의 침략위협을 강조하기만 할 뿐,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얼마나 큰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둔감하다.
끝으로, 오랫동안 북한을 지배한 김일성의 개인적인 성향도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의 과대망상이 북한 사회를 더 큰 곤경에 빠뜨렸다고 톰슨은 판단하였다. 톰슨의 주장에 우리가 무조건 동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