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노무현의 이적 총정리 !
노무현의 죄: 이 이상의 간첩죄는 없을 것이다. 아래 자료는 많은 시간에 걸쳐 수집한 자료다.
대한민국 건국 부정
* 2003.2.25. 취임사에서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시대”라고 발언했다.
* 2003년 3.1절 기념사에서 "우리의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다"고발언했다.
* 2004.9.5,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에서 노무현은 애국가와 묵념을 생략했다.
* 2005.07.01.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것은 지난날 역사의 고비마다 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항상 좌절하고 분열 세력이 승리해왔다는 사실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분열세력 승리’ 언급의 의미와 관련, “이승만 대통령의 남한 단독정권 수립, 이후 지역주의 조장 세력의 장기집권 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법 무시
* 1988년 12월26일 현대중공업파업현장: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발언
공산당 지지, 민족의 원수를 찬양
* 2003. 6.13. 일본 발언: "나는 한국에서 공산당을 합법화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 2003. 7.10. 중국 발언: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모택동 주석이다”
반 대한민국-반 연합국
* LA발언: 2004.11.12. “북한이 ‘핵은 외부 위협에 대한 억제수단’이라고 한 것은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문제협의회(WAC)에서)
* 몽골발언: 2006.5.9일,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려 한다. 제도적 물질적 지원을 조건 없이 하려한다.”(몽골 울란바토르,)
* 청와대 망언: 2006.8.18일,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에 반대한다. UN안보리를 통한 제재에도 반대한다. 북한에 경제지원을 보다 더 해주고, 체제안전 약속해야 한다”
* 헬싱키 발언: 2006.9.7일, “대포동 실험발사는 그 미사일이 미국까지 가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한국으로 향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래서 저는 무력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발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북한 미사일은 무력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발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정치적 목적에 의한 정치적 행동으로 보지 않고 실제 무력적 위협으로 보는 언론이 더 많은 것이 문제를 어렵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 한국으로서는 핵실험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언제 할 것인지에 관해 아무런 징후나, 아무런 단서를 갖고 있지 않다. 근거 없이 계속 가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불안하게 할뿐이다.”(핀란드 헬싱키,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은 2006.10.9에 핵실험을 강행하여 전쟁 말고는 가장 강력한 UN결의안 1718을 자초했다.
* 10월1일 노무현이 서울(밀레니엄 힐튼)에 올라와 10.4공동성명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런 취지의 발언을 했다.
1) 실용주의의 반대말은 ‘친북 좌파주의’다.
2) 국가보안법을 건건이 들고 나오는 것은 실용주의가 아니다.
3)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공조 체제는 실용주의가 아니다.
4) 연방제 말만 나오면 시비를 거는 것도 실용주의가 아니다.
5) 6·25전쟁은 남침인가, 통일전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악의적인 이념공세다.
6) 국보법은 이념적 대결주의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어 남북 대화의 걸림돌이 된다.
7) 북한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큰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
8) ‘작전계획 5029’를 북한 중국과의 신뢰를 훼손할 수도 있는 부담이 있어 강행하면 안 된다.
9) 북한을 내재적 접근법으로 보아야 한다.(송두율 학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목적을 북한의 처지에서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주한미군의 주둔과 대규모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북한이라면 어떤 느낌을 갖겠느냐
4.3사건 역사 뒤집기
* 2003.3.21(금) 고건총리와 박원순 주도로 4.3사태에 대한 역사를 뒤집었다. 같은 해 10월 31일 노무현은 제주도민에게 4.3 사건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서 공식 사과했다. 그는 4.3사태의 기점을 1948년 4월3 일로 하지 않고 1947년3월1일로 잡았다. "제주도에서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서 1948년 4월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1947년3월1일에는 전국적으로 찬탁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은 곧 폭동으로 변했다. 제주도에서도 각 면소재지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동원됐다.
이들은 3.1절 행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 지지’를 외치는가 하면 ‘양과자를 먹지말자’ “사대주의를 척결하자”는 등의 반미구호를 외치면서 ‘3.1절 경축대회’를 찬탁시위 군중대회로 돌변시켰다.
바로 이 때 시위를 진압하던 기마경찰이 어린이 1명을 치어 상처를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을 본 좌익분자들은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군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순식간에 시위군중으로 퍼져나갔고, 평소부터 경찰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군중들은 경찰관에게 돌을 던지고 기마경찰관 1명의 발을 잡아 강제로 끌어내리는 등 과격한 소요사태를 이끌어 냈다. 노무현과 좌익들이 3.1사건을 4.3사건의 기점으로 보는 것은 4.3시건이 기마경찰의 반인륜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지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호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념 부적격자 국정원 수뇌부에 임명
* 2003년4월, 국회가 친북성향 및 이념편향자라고 규정하고, 임명에 반대한 고영구와 서동만을 각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