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천안함·연평도 도발에 대해 전혀 태도 변화가 없는데도 이명박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에 연연하며 구걸하듯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지난 9일 독일 베를린 방문 중 “내년 3월26 ~ 27일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위원장을 (서울에) 초대하겠다”고 느닷없이 김정일 서울 초청 카드를 내놓더니, 이를 북한이 거부했는데도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18일 남북 비밀 접촉 사실까지 공개하며 “진의가 전달됐다”고 애걸하듯 했다.
국가정보원 제1차장 출신인 김숙 유엔대사도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있고 하니까 뭘 할 수 있으면 금년에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젠 남북정상회담 협상에 내놓고 나서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북한은 연평도·천안함 도발과 핵폐기에 대해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은 물론 디도스공격, 위성위치정보시스템(GPS) 교란, 농협 전산망 해킹 등 추가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상회담을 구걸하다시피하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고 있다. 북한은 이 대통령의 베를린 발언 직후 10일 인민무력부, 11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이 차례로 나서 이 대통령을 ‘역적패당’‘역도’‘가관’ 등 입에 담을 수 없는 표현으로 비난하고, 농협 전산망 해킹과 천안함 폭침까지 모두 날조극이라고 덮어씌웠다. 이런 판에 청와대와 국정원이 북한과 비밀 접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설령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다 해도 그 의도는 자명하다. 대화 시늉을 함으로써 도발 책임과 핵개발 제재를 피하면서 최대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다. 최근 남북 적십자회담, 군사실무회담, 백두산회담 등이 흐지부지 끝난 것만 보더라도 북한의 진정성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로버트 킹 미국 북한인권특사의 방북을 이끌어냄으로써 억류중인 한국계 미국인 전용수씨와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을 맞바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일부 종교단체들이 무조건 대북 지원에 나서기로 하는 등 남남갈등을 증폭시키는데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천안함 폭침 이후 이 대통령과 정부의 5·24 대북 제재 조치 발표가 시행 1년을 맞고 있으나, 대표적으로 폐쇄까지 검토됐던 개성공단의 규모, 체류인원, 대북 송금액이 모두 증가하는 등 대북 제재 조치가 허장성세(虛張聲勢)였음이 그대로 입증됐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김정일의 눈치를 보느라 북한인권법조차 제정하지 못했다.
1월19일 미·중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포함된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에 대한 제재도 이끌어내지 못할 정도로 외교적 무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청와대와 국정원이 서두르고 있는 건 지난달 26 ~ 28일 방북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활용한 김정일의 ‘조건없는 정상회담’ 카드에 호응하는 것으로도 비친다. 어설프게 정상회담에 나설 경우 휘몰아칠 후유증과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김정일과 만나자고 추파를 던지는지 답답한 일이다. 더 이상 구걸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