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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간된 대한민국의 주요 일간지이다. 2003년 발행부수가 230만부에 달하여 대한민국 일간지 중 가장 발행부수가 많다. 조선일보는 이처럼 9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독자를 끌어모은 신문이지만, 반면에 그렇게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 많은 신문이기도 하다.
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벌이는 단체와 학자들은 일본 제국, 군사독재 정권과 조선일보의 친화성을 비난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조선일보가 친재벌적 성향을 보이며, 보수주의적 입장을 위한 왜곡과 과장을 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초 조선일보는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지지하는 대정실업친목회의 회장 예종석의 명의로 1920년 1월에 발행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3·1 운동이 거센 시점에서 1920년대 조선일보의 보도는 노골적인 친일 일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는 동아일보와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 신문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 또한 조선일보의 사주 방응모의 친일 행각도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와 이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조선일보에 어쩔 수 없이 친일기사가 게재되었으며 민족지로서의 면모가 있었다고 반론한다.
1.1 방응모의 친일 행적[편집| 원본 편집]
첨부 이미지 방응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 말기 조선일보 사장으로서 친일 행위를 한 기록이 있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외희(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및 조선일보측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1944년 조선항공업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한 부분에 대해 친일행위로 판단한 부분을 취소하지만 나머지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행위로 인정된다."라고 판결했다. 방응모는 1933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이 극동평화를 확립시킬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2]
1.2 일본 제국 찬양[편집| 원본 편집]
1930년대 후반, 조선일보에는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첨부 이미지
문제의 1940년 1월 1일 조간 1면 머릿기사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위덕(御威德)’, 천황의 사진, 제호 위에 게재된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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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는, 한글로 표기되고 있다.•1936년부터 1940년까지 매년 1월 1일 일본 제국 천황 부처의 사진과 친일 성향의 신년사를 1면 머릿기사로 게재하였다. 특히, 1940년 1월 1일에 실린 사진에는 일본 천황이 예복 대신 군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으며, 사진 위에 용그림과 '황기 2600년'이라는 문구가 추가된 점이 특징이다. 신년사에는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3]
•1937년 12월 7일부터 12월 14일까지 기간 동안,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대한 기사를 '아군의 승승장구'라는 제목으로 4차례 1면 머릿기사로 실었다. (그 이전에도 일본군을 '아군', '황군'으로 불렀다.)[4]
총후(銃後)의 임무 - 조선 군사 후원 연맹의 목적
북지사변이 증대화하기 시작하자 조선 역시 제국시민으로서의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 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 군사후원연맹의 목적은 이미 그 규약 중의 목적에 관한 문구(文句)를 보고 알 바와 같이 총후의 임무를 다하자는 데 있다. 황국(皇國)의 위무선양(威武宣揚)과 동양평화를 쌍견에 질머지고 제일선에 선 출정장병으로 하여금 안심과 용기를 가지고 신명을 도(賭)하여 제일선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데는 총후에 선 일반국민의 정신 물질 양방면에 긍하여서의 후원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 1937년 8월 12일 조선일보 사설
•1938년 1월 1일 중일전쟁 기사의 참고 그림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였다.[5]
•1939년 4월 29일 사설에서 쇼와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육체가 유강하옵시다고 배승하옵는 바,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일도(一年一度)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鴻遠)한 은(恩)과 광대한 인(仁)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慶幸)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적성봉공(赤誠奉公), 충(忠)과 의(義)를 다하야 일념보국(一念報國)의 확과한 결심을 금할 수가 없으며…
— 1939년 4월 29일 조선일보 사설[6]
•그 밖에 사설을 통해 학도병 징집 촉구와, 일본제국에 황국신민된 감격과 감사에 넘쳐서 식민의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한 것과 1939년 이봉창의 일왕에 대한 폭탄 투척 사건을 비난하여 이봉창을 질 나쁜 테러범으로 묘사한 점 등으로 1930년대 후반부의 친일 행적에 대한 비난이 있다.[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