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한국개발연구원) 공식
http://www.ksp.go.kr/api/file/download/11460?downloadFilename=01+%ED%95%9C%EA%B5%AD+%EC%A0%84%EC%9E%90%EC%82%B0%EC%97%85%EC%9D%98+%EB%B0%9C%EC%A0%84_%EA%B8%B0%EB%B0%98%ED%98%95%EC%84%B1%EA%B8%B0%EB%A5%BC+%EC%A4%91%EC%8B%AC%EC%9C%BC%EB%A1%9C.pdf
"1961년 7월 박정희는 부산의 금성
사 공장을 방문했는데, 금성사는 어렵게 국산화한 라디오 생산이 밀수품 때문에 중단될 위기에 처
했다고 호소했고 이에 공감한 박정희는 강력한 밀수품 단속을 지시했다. 그 결과 1960년 몇 천 대
에 불과하던 금성사의 라디오 판매 대수가 1962년 한 해에만 13만 7천대로 급증했다. 이는 같은 해
국내에서 판매된 총 라디오대수 34만대의 40%가 넘는 숫자였다(서현진 2001:85)."
밀수품 단속령과 함께 금성사의 초기 경영에 큰 도움을 준 또 하나의 정책은 농어촌 라디오 보
내기 운동이었다. 금성사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운동은 1962년 7월 군사정부의 정당성과 경제개
발의 필요성을 알리는 대국민 홍보를 위해 공보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국적인 바람을 불러일
으켰다. 1963년까지 계속된 이 운동으로 전국 농어촌에 보낸 라디오가 20만 대가 넘었다(서현진
2001:86-87).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에서 1966년 이전까지는 전자산업에 대한 체계적인 육성 전
략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과 수입관세를 통해 국내산업을 보호하고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통해 국내수요를 확충하는 등 일부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국내 기술 역량 배
양과 인력 개발을 통해 국내 부가가치를 제고하는 정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특히 최종 제품을 조립
하는 차원을 넘어 핵심부품을 국산화하고 회로설계 기술 등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정책은 거
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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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공업진흥 5년 계획
제1차 경제개발 5년 계획(1962~1966)의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 정부는 향후 유망산
업을 물색하였다. 미국에서 전자요업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던 김기형 박사는 1966
년 여름에 귀국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자산업과 요업(세라믹 공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므로
한국에 매우 유리하다고 건의하였다(전자산업 50년사 편찬위원회 2009:128).21)
이후 박 대통령이 상공부에 전자공업 육성에 대한 관심을 표명함에 따라 상공부는 이만희 전기
공업과장과 윤정우 통신공업계장을 중심으로 전자공업육성기반구축작업에 착수했는데..(요약)
그냥 정치색 빼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찬찬히 읽어 보시면 나쁘지 않을거 같네요.
정치색에만 온 열정을 쏟는 분들은 '그거 사실 구인회씨가 1959년부터 했거등~~' 같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되내일 뿐이니까요.
아 물론 저는 2000년대 초반 DJ정권의 IT육성 계획도 굉장히 시의적절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