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미군만 보면 깁미 쪼꼬렛또 하던 시기...
한 해 200만명씩 굶어죽던 1960년대 혜성처럼 등장.
새마을 운동, 비료사업등으로 4년만에 식량문제 극복하더니 (1000만명 새 생명~~~)
오늘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5대산업의 뼈대를 15년만에 완성함
멍청한 대중이가 경공업이랑 농사 지어서 외세에 영향받지 않는 내수중심의 경제구조 만들자고 할때
그건 개소리라고 그래서는 미래세대가 거지 된다고
중화학, 전자, 건설, 자동차, 조선산업이 이때부터 태동됨.
청암 박태준은 ‘제철보국’의 기업가정신으로 포항제철의 창업 건설·경영에 평생을 바친 창업자다. / 포스코 제공
청암 박태준은 누구인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생전에 “박태준은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다”고 말했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청암이 타계하자 “스티브 잡스가 정보기술(IT) 업계에 미친 영향보다 박태준이 우리나라 산업과 사회에 남기신 공적이 몇 배 더 크다”고 평가했다. 깐깐한 소설가 조정래조차 “한국의 경제 발전사 위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인물”이라며 ‘마하트마 박’으로 칭하고 싶다는 말로 높이 우러렀다.런데 정작 생전의 박태준은 자신이 높이 평가받고 ‘철강왕’으로 불리는데 대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을 작곡하셨고, 저는 그분의 작곡에 따라 연주자들을 지휘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박태준과 박정희 두 거인의 만남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어낸 것은 한국 현대사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5년 6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조용히 청와대로 불렀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두 가지 큰 계획, 경부고속도로와 종합제철소 건설에 대한 중대 결의를 털어놓는다. “고속도로는 내가 직접 감독할 테니, 종합제철은 임자가 맡아.” 대통령의 그 한마디가 철강왕 박태준 쇳물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8년 4월 1일, 서울 한복판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기념식이 열린다. 바로 지금의 포스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식이다.“포항종합제철의 모든 성공여부는 지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사명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잘못은 영원히 기록되고 추호도 용납될 수 없으며 가차 없는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박태준이 낭독한 포항제철 창립사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비장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마치 전쟁에 출정하는 장수의 출사표와도 같았다.그것은 포스코 창업이 실로 국가의 대계(大計)였기 때문이다. 박태준의 기업가정신을 특징짓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이 여기에서 나온다. 박태준은 1978년 3월 28일 직원들을 위한 연수원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입니다. 따라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입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착공버튼을 누르는 청암 박태준과 박정희 대통령. 두 거인의 만남이 지금의 포스코를 만들어냈다.
제철보국은 철강 불모지에 포스코를 세워 세계 일류 철강기업을 키움으로써 조국 근대화의 견인차가 되겠다는 박태준의 다짐이자 평생의 사명이 된다. 박태준은 기업의 성패는 기업구성원, 즉 임직원의 정신적 자세에 있다고 믿었다.
박태준의 기업가정신을 말할 때 ‘우향우 정신’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는 청암이 임직원들에게 “목숨을 걸자. 조상의 핏값(대일 청구권)으로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사무실에서 똑바로 걸어 나와 우향우 한 다음 영일만 앞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독려한 데서 비롯됐다.영일만에서 우향우를 하게 되면 바로 동해바다다. 우향우 정신이란 ‘포항제철소 건설에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죽자’는 지독한 결기를 의미한다. ‘우향우’는 박태준을 상징하는 표어이자 전통이 됐다.박정희 대통령은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한 박태준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포항제철을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철저히 보호해주었고, 1968년부터 1979년 사이에 무려 13차례나 포항제철을 방문해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박태준에게만은 언제든지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 특권도 주었다. 이런 특별대우가 포항제철 임직원들의 헌신을 한껏 끌어올리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향우 정신은 한편으로 혹독한 자기검열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박태준은 그 잣대를 영일만 현장의 모든 임직원들에게 요구했다. 이대환 작가가 쓴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의 한 대목을 보자.제강공장의 파일에 콘크리트를 먹이는 날이었다. 천우신조로 박태준은 지휘봉을 들고 마침 높다란 철구조물 위에서 그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레미콘 트럭이 쏟아내는 콘크리트를 받아먹은 땅 속의 강철 파일들이 슬며시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가. 순간 그의 동공에 불꽃이 튀었다. 박태준은 즉각 공사를 중단시키고 불도저를 불러오게 했다. “밀어봐.” 불도저가 비스듬히 기운 파일을 건드리자 맥없이 쓰러졌다. 옆의 똑바로 서 있는 파일도 맥없이 쓰러졌다. 있을 수 없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책임자 나왓~” 책임자는 일본 설비회사의 하청을 받은 한국 건설회사 소장이었다. 박태준은 지휘봉으로 그의 안전모를 내리쳤다. 단번에 지휘봉이 두 토막 났다.
“너는 민족 반역자야. 조상의 혈세로 짓는 공장에서, 야! 저게 파일로 보이나? 저건 담배꽁초야, 담배꽁초! 천장의 전로에서 쇳물이 엎질러지면 밑에서 일하는 동료가 타죽거나 치명적 화상을 입는 거야. 그래서 부실공사는 적대행위야!” 비서가 건네준 두 번째 지휘봉이 부실공사 책임자의 안전모 위에서 또 부러졌다. 제강공장의 ‘꽁초 사건’은 바람을 타고 아주 빠르게 모든 현장으로 빠짐없이 번져나갔다.
제철보국으로 애국한 한국의 철강왕
장례위원회는 "애초 회장님이 일생을 바친 포스코 근처로 모시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산지를 훼손하고 길을 새로 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며 "대전과 동작동 현충원을 검토하다 때마침 접근성이 좋은 동작동 현충원에 공간이 생겼다"고 장지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고인도 유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동작동 현충원에 잠들기를 원한다고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http://www.kyongbuk.co.kr)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됐다.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 보장과 독립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빈곤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Necessitous men are not free men)"
△이 돈은 우리조상님들의 피값이다. 공사를 성공못하면 우리 모두다 우향우 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포항제철 설립 초기 강한 의지 피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