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드디어, 이른바 조중동의 패밀리 격인 종편 채널들이 앞 다투어 개국했다.
채널 번호가 확정된지 불과 수일만에 개국방송을 하느라 방송 사고니 준비 부족이니 말들이 많았음은 물론.
그런데, 왜 하필이면 12월 1일 이어야만 했을까?
불과 며칠전에야 채널 번호가 부여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졸속 편성의 따가운 시선에 대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그리 급박하게 서둘러 전파를 발사했어야만 했을까?
여기에는 최소한 두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가지는 지켜보는 의혹의 시선들을 납득시키려는 대외 발표/홍보용 이유(보도 자료용),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실제로 그래야만 했던(절대 12월 1일을 놓칠 수 없는) 원초적/실제적 이유...
- 정치게시판이지만, 처음 글을 남기는 입장에서 아직 본인의 정치적 입장/관점을 직설(直說)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정치적 시비(是非)는 배제하고 될 수 있는대로 사실과 현상에 집중해서 기술하려한다.
편의상, 등장하는 모든 인물(정치인/비정치인)들의 호칭에서 경어는 생략하기로 한다. -
9사단장 자리를 육사 동기생이자 절친 노태우에게 물려(?)주고 보안사 사령관으로 있던 전두환은,
1979년 10. 26 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로 부터 정확히 47일 후인 1979년 12월 12일,
노태우 및 하나회 동지(同志)들의 협력으로 9사단 전차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향한다.
이른바 12. 12 사태(군사반란)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경기도 고양에 위치한 9사단 백마부대는 월남전에도 참전해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며,
9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 100대 최강 전투력 사단' 리스트에도 거의 매년 리스트업 되던 대한민국 최정예 예비사단이었다.
90년대 초반 일어난 걸프전이 2~3개월만 더 지속됐어도 9사단이 투입됐을 것이다. (최종결재만 기다리던 상황)
(예비사단이란 북한의 침략 발발시 최전선에서 적과 교전을 펼치며 남침을 차단/지연시켜야 하는 부대이다.
남침이 일어나면 경계 역할을 하던 최전방 부대는 뒤로 빠지고 예비사단이 최전선을 지킨다.
실제 전장(戰場)에서 가장 많은 희생이 따르는 부대이며, 따라서 엄청난 훈련과 충성심/정신무장을 필요로 한다.
역대 사단장 중 대통령을 두명이나 배출했으니, 당시 9사단장 자리라 하면 달리 설명이 필요없는 요직이라 할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9사단에서 군복무를 한 본인은 그분(?)이 온다는 첩보만 돌면,
소총에서 공이 빼내고, 아스팔트며 화단 바위까지 하이타이로 닦았고, 사과나무-배나무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댔다.
위 얘기들은 과장이 전혀 안 섞인 실제 사실임.
자신이 사단장을 역임했던 부대에 대통령이 돼서 시찰차 와 본다는 얘기니 전혀 신빙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그분이 오기는 했다. 4번 정도 그분이 온다고 부대 전체가 생난리를 피웠는데 딱 1번 왔다. 좀 애매하긴 하지만.
헬기 탄채로 공중에서 그냥 아래쪽으로 손 한번 흔들어 주고 갔다.
그분이 부대 땅을 밟지는 않았지만 공중도 엄연한 부대 영역 내이니... 온 거라고 봐야 한다. 된장...-_-)
타고난 정치적 야심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공사례(군인 ---> 대통령)로 용기백배한 전두환은,
9사단장을 거쳐 보안사 사령관직에 있으며 몸에 배인 군인 색깔을 슬슬 빼고 박통 이후의 대권에 대한 야심을 키우던 시기.
물론 보안사 사령관 자리는 9사단장 자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최요직.
당시 보안사 일반 사병은 장발에 사복근무였으며, 군법을 위반한 장성급들 쪼인트를 까기도 한다는 믿기 힘든소문도 전해졌다.
(보안사의 힘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커진데는 중앙정보부(훗날 안기부를 거쳐 現 국정원)의 몰락 여파가 컸다.
당시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탓에 중정의 파워는 눈에 띄게 약화됐고,
본래 군내부 수사기관인 보안사의 역할이 기이하게 확대되어 중정 대신 대공/민간인 사찰조사 까지 벌이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10. 26 사태(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범 김재규(중앙정보부장)와 무고했던 참모총장 정승화를 내란죄로 조작하여 엮은 후,
필연적으로 자연발생할 국가적/국민적 대혼란&위기설을 틈타 정권 장악을 노린 이 12. 12 사태는,
태릉을 빠져나와 동대문-종로-광화문까지 이어진 육사생도들의 지지 행진(데모)으로서 사실상 성공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당시 전두환의 정치적 야욕에 못마땅해 하던 강원도쪽 사단-군단장들은 12월 12일 아침 사태를 보고 받고,
1961년 5. 16 군사정변 이후 18년만에 부활한 군사혁명의 망령을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고 긴급대책회의에 들어갔으며,
실제로 강경파였던 몇몇 사단-군단장들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서울로 진격해 전두환을 잡자"며 행동개시를 부르짖었지만,
육사생도들의 지지 선언/행진을 보고 받고는 허탈해 하며 그대로 모든 걸 접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1979년 당시만 하더라도 육사생도들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애정은 엄청난 수준이었기 때문.
그만큼 전두환의 상황 예측/대비력과 탄탄한 인맥관리가 놀라울 뿐이고,
18년 전 5. 16 쿠데타 때 육사생도로서 최초로 박정희 지지입장을 밝히며 故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전두환이,
18년 후 똑같은 일을 벌이며 빈틈 없이 치밀한 준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작은 인물이 아니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제일 먼저 벌인 일 두가지가 바로 삼청교육대와 언론/방송 통폐합이었다.
의심의 눈으로 보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며 이미지 개선을 위해 깡패를 소탕한다는 인기 전략에다가,
군인의 입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부담감에, 언론/방송을 장악하여 뒷탈을 없애겠다는 노림수였다.
(물론,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과잉의욕으로 삼청교육대에서 깡패보다 훨씬 더 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켰지만...)
당시 대한민국 TV 채널은 딱 3개였다. MBC(11번), KBS(9번), TBC(7번) - 서울 기준.
이중, TBC는 삼성 계열의 방송사나 마찬가지 였다. (삼성-제일제당-중앙일보-TBC 등...)
故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경남 진해에 자비를 들여 따로 개인 별장을 지어 바칠 정도로,
그때도 역시 故정주영 회장(현대 창업주)을 비롯한 '현대'는 여당색이 짙었다.
그러나 故이병철 회장(삼성 창업주, 現 이건희 회장의 父)의 '삼성'은 그렇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야당색을 띤 것은 아니었고, 그저 어느 쪽의 색도 여간해선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까?
그 부분이 전두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아니면 못내 뭔가를 불안하게 했는지,
정권을 잡은 군부가 MBC는 살려주고, KBS는 하나를 더 늘려주더니(1TV / 2TV), TBC는 완전히 없애 버렸다.
(지금 KBS-2TV가 사용하고 있는 7번 채널이 원래는 TBC의 것. SBS는 90년대 초에 개국)
그렇게 언론/방송 통폐합이 발표되던 날이 1980년 11월 14일이었고,
2주 정도의 유예 끝에 TBC가 눈물의 마지막 방송을 한 그날이 바로 1980년 11월 30일이었다.
그래서, JTBC는 어떻게든 12월 1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31년 전 11월 30일에 눈물을 흘리며 껐던 전파를, 정확히 31년 후 12월 1일에 쏘아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JTBC가 서두르자 넋놓고 있다가 뒤처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TV조선과 채널A, MBN 등이 어쩔 수 없이 같은 날 개국하며 준비 부족 등 애꿎은 덤태기를 함께 쓴 것. 자업자득이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은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단지, 광고 시장이라는 게 12월이 성수기이고 1, 2월이 비수기여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고.
그러나, 31년 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본인을 포함해서)이 과연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31년 전...
엄밀히 따지자면 여당측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아야 했던 그들이,
31년 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여당 편에 서있다.
그들(?)의 무서움을 너무나 뼈저리게 잘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뒷맛이 개운치 않은 건 사실이다.
사실 어제 궁금함+호기심에 종편과 지상파를 왔다 갔다 하던 본인은 무척이나 재미가 넘쳐났다.
종편이 개국하는 날에 맞춰 지상파들이 너도 나도 종편 견제용(?) 야심작들을 터뜨려대는 꼴이라니.
왜 하필 MBC는, 12월 1일 종편 개국날에 맞춰 무려 12년 만에 주병진을 복귀시켰을까?
왜 하필 SBS는, 12월 1일 종편 개국날에 맞춰 1억을 걸고 대국민 문자메시지 퀴즈쇼라는 센세이셔널 한 기획을 선보였을까?
우연이라고 그냥 넘기기엔 너무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지 않는가...
과연 종편이 각종 특혜와 루머로 얼룩진 밀실협약의 주홍글씨를 지워내고,
내년 4월 총선 이후에도, 궁극적으로는 내년말 대선 이후에도 온전히(지금의 각종 특혜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본인은 49%의 확률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그러는데, 도박에서 51%의 확률은 100%나 마찬가지라고 하길래...
* 참고 - 12월 1일 지상파 프로그램 시청률
1. 9시~10시
- 일억 퀴즈쇼(SBS) : 7.2%
- 뉴스데스크(MBC) : 8.2%
- 뉴스9(KBS-1TV) : 18.8%
- 호루라기(KBS-2TV) : 8.2%
계 : 42.4%
2. 11시~12시 XX분
- 주병진 토크콘서트(MBC) : 8.0%
- 스타부부쇼 자기야(SBS) : 5.5%
- 해피투게더 3(KBS-2TV) : 10.3%
- 뉴스라인(KBS-1TV) : 8.7%
계 : 32.5% (이상 TNmS 시청률 참고)
** 평일 밤 프라임타임(8시~11시) 지상파 시청률 합은 보통 35%~45%, 심야시간대(11시~12시 X분)는 30~40%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어제 개국 첫날을 맞은 종편 채널들의 시청률은 아마도 거의 처참한 수준이었을 거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