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00:00시를 기해 내려진 전국확대계엄에 따라 전국 201곳의 지역에 2만3천8백6십명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물론 실제 국민탄압은 하루 전날인 5월 17일 오후1시에 열린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에서 대공처장 이학봉이 예비검속을 실시해 체포를 개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진행됐다.(제5공화국 전사, 보안사 1982) 회의 직후 광주에서는 505보안대에 의해 22명이 잡혀 갔다.)
정작 핵심인 보안목표 109곳에는 불과 2,385명만이 배치된 반면 나머지는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 병력의 93%인 2만2천3백4십2명이나 배치됐다.
서울-
강북: 15개 대학에 계엄군 10,912명, 장갑차 39대 배치.
강남: 3개 대학에 계엄군 1,999명, 장갑차 20대 배치.
경기-
4개 대학에 계엄군 1,382명, 장갑차 21대 배치.
강원-
11개 대학에 계엄군 847명, 전차 3대, 장갑차 7대 배치.
충청-
8개 대학에 계엄군 1,019명 배치. (2군 3관구)
경상-
경북: 9개 대학에 계엄군 2,102명, 장갑차 2대 배치. (2군 5관구)
경남: 12개 대학에 계엄군 2,250명, 장갑차 2대 배치. (2군 2관구)
전라-
4개 대학에 계엄군 1,953명 배치. (전교사)
충청과 호남지역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날짜보다 훨씬 이전인 5월 10일 오후 2시 56분에 2군에서 전교사에 명령을 하달해 전북대에 7공수여단 32대대, 충남대에는 7공수 31대대, 전남대와 광주교대에는 7공수 33대대, 조선대와 전남의대에는 7공수 35대대를 배치하도록 계획했다. 이미 7공수 여단은 충정훈련을 매일 실시했다. - 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5.10 (실제로는 전북대에는 31대대가, 충남대에는 32대대가 서로 바뀌어 배치됐다.)
5월14일에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투입되어 전일방송, KBS, MBC, CBS 등 방송국과 주요 시설물에 31사단이 배치됐으며(작전상황일지, 31사단 1980.5.13~5.28), 전교사는 5월14일에 5.18 00:00 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실시될 충정작전(화려한 휴가)에 대비해서 주요 목표물을 파악하도록 31사단과 35사단에 명령을 내렸다(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5.14)
5월15일부터 5월 17일까지 전교사에서 트럭 29대, 3관구사령부(대전)에서 트럭 19대, 35사단에서 트럭 18대가 금마에 위치한 7공수 여단에 도착했다.
계엄령 전국확대를 다룰 국무회의가 아에 열리지도 않은 5월17일 오후 5시에 2군사령부는 "충정작전 유효, 5.18. 00:01를 기해 불순분자를 체포, 5.18. 04:00 이전 주요 학교 점령"(군 사령관 구두 지시) 명령을 내리고, 학교 점령시간 변동지시(04시에서 02시로 변경)를 하달했다.(육본 작상전 414호)
전북대는 5월18일 새벽1시5분, 충남대는 새벽1시25분, 전남대와 광주교대는 새벽2시, 조선대는 새벽2시30분에 계엄군에게 점거당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 오후 1시 이후에야 전남대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거리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에는 광주지역 대학생들이 도청에 모여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울지역 대학들이 신현확의 자유 대선과 총선실시를 약속한 특별담화를 믿고 5월 15일 밤을 기해 수업으로 복귀한다는 결의를 내린데 반해,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5월 16일 3만여명이 모여 횃불 시위를 전개해 5.16 화형식을 끝낸 후 시위현장 길거리 청소를 실시하고는 며칠간은 사태를 관망하며 쉬고 5월 19일에 다시 결의대회를 열자며 시위를 마감했다.
호남지역 대학들을 점거한 7공수 여단은 교내에서 학생들 79명을 잡아갔다. (그중 전북대에서는 학생이 연행을 피하려다 실족했다. 전투상보- 7공수 여단 1980) 전교사 전투상보 기록에는 169명으로 더 많은 연행자 숫자가 적혀 있다.
5월 18일 확대 계엄령 포고와 강제 휴교 사실을 모르던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에서 출입통제 당하자 도서관 이용 등을 내세우며 항의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확대계엄령이 발동되면 오전 10시에 정문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한 학생들이 약속장소에 나타나면서 200여명으로 항의학생 숫자가 늘어 났다.
계엄군은 학생들의 항의가 지속되자 2개 지대를 정문에 더 배치했고, 학생들은 병력증강에 분노해 일부는 돌을 집어들어 던지기도 했다.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무력진압에 나서 인근 주택과 상가는 물론 시내버스 안까지 뒤지고 다니며 젊기만 하면 아무나 걸리는대로 무작정 곤봉으로 때려 기세를 꺾어 놓고 봤다.
"초동단계에 신속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해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 한다"-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 보안사 정보처 1979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도 시민들을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을가해 충격적인 폭력을 휘두를 준비를 이미 충정훈련을 통해 마친 상태였다. 각 공수여단은 80년 2월부터 정규 훈련을 거의 포기한채 시위대와 진압군으로 역할을 나눠 오직 시위진압 충정훈련만 했으며, 그 강도는 기존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
교문 앞에서 강제 해산당한 학생들은 화를 삭히지 못해 도청으로 향했고, 이동 중에 저지하려는 경찰 진압대와 동구 카톨릭센터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시내 시위 발생을 확인한 계엄군은 오후 3시 40분에 7공수 33대대와 35대대를 투입시켜 오후 4시에 금남로와 충장로에 도착해 진압작전대형을 갖췄다.
5월18일 오후 3시에 수도경비사령부는 서울 동국대를 점거하고 있던 11공수여단에 명령을 내려 1개 대대는 수송기로, 여단은 열차를 이용해 광주에 내려가 2군 작전통제하에서 광주시위를 진압하라고 했다. 기다렸다는듯 11공수여단은 불과 명령을 받은지 43분만에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육본 작전명령 19-80호, - 전투상보, 11공수여단) 11공수여단은 다음 날인 19일 새벽 3시에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 11공수여단은 4월 초에 발생했던 사북탄광 노동자 생존권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1군 사령부 명령에 의해 출동할 뻔 하기도 했다.
총장퇴진시위라구요?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