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라도 새끼들 40만쯤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고 공수부대 영관급 장교가 말했다는 증언 - 강길조
2. 이 발언이
5월 20일(?) 금남로에서 조진우씨가 진압군에게 직접 들어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그 것과 같은 것인지는?
http://theacro.com/zbxe/1801093.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2.12, 5.18 실록』-
5월 19일 오전 8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윤흥정 전남북계엄분소장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씨를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소요사태는 배후조종세력이 지역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시키고 있으니 전단 공중살포 등 역대책을 강구해 선무활동을 강화할 것"이라는 내용.
4. 특전사 전투상보(1980년
5월 19일 오전 금남로 상황 개요) - ..... 일부 시민이 .... '경상도 출신 군대가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구호를 외치고....
5. 5월 20일에 이어
22일 은밀히 광주에 내려온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당시 광주에 방문한 박충훈 총리서리 참석하에 열린 간담회에서 '전라도 싹쓸이' 발언(전라도 싹 쓸어라, 광주 놈들 싹 죽여라)을 했다는 증언 -
정웅 제31사단장. (정호용은 부인함.)
6. "광주에서는 1980. 5. 16.까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나 같은 날 저녁 전국총학생회장단 모임에서 향후 시위를 자제한다는 결정이 있은 후 5. 16.의 민주화대성회 집회를 끝으로 다음 날인 5. 17.에는 시위가 없었고, 5. 18. 도 평온하였다.
그럼에도
5. 18. 제7특전여단이 광주에 도착, 광주의 최번화가인 충장로와 금남로에서 작전을 개시하였고,
같은 날 15:00경 특전 사령관 정호용은 “현지에서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린다는 유언비어 등으로 상황이 7공수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1988. 12. 19. 국회 청문회 속기록 중 당시
제11특전 여단장 최웅의 진술)며 예하 제11특전여단의 투입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실제 제7특전여단과 학생들 사이의 최초 충돌이 일어난 시간은 특전 사령관 정호용의 투입지시가 있은지 50여분이 경과한
1993. 5. 18. 15:50 경으로서 제7특전여단이 광주에 투입되어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제11특전여단의 투입결정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 전두환 외 34명에 대한 고소장(1994년 5월)
7. 이상과 같은 사실과는 별개로, 김영택은 당시 "경상도 군인"에 관한 풍문이 돌았던 것은 사실인 듯 기록합니다. 1과 2의 사실이 확대 전파된 것인지 별개의 고의적인 유포행위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신군부의 의도대로 된 것이죠.
당시 신군부가 학살지로 '광주'만을 택한 이유는 커다란 차원에서 '공포'로 통치하기 위함일테고, 또한 반대세력을 지역적으로 '분할 점령'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겁니다. 진압작전에도 전술적인 차원의 '분할 타격'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전략과 전술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하다니 위대한 장군이라고 치켜세워야 하는 것인지 씁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