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에 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에 갔다.
지난 5년간 거의 해마다 출장으로 한두차례씩 간 타이베이는 언제나 똑같다.
3월에 가도 6월에 가도 언제나 습하고 더운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고 낡고 오래된 건물과 거리를
가득 매운 스쿠터의 행렬 등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다.
바쁜 일정 중에 모처럼 시간이 나 國父기념관(손문,손중산)과 中正(장개석)기념관을 차례로 들렀다.
마침 국부기념관에서는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 특별전시전이 열리고 있었고 운좋게도 손문 동상을 지키는
위병 교대식도 볼수 있었다.
중정 기념관은 안타깝게도 내부 수리라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있는 동상과 각종 기념물을 보지 못하고
그저 먼 발치에서 보는걸로 만족해야 했다.
타이완 인들은 오랫동안 손문과 장개석 두 명을 국부로 추앙해왔고 이 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금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살았다.
심지어 장개석 기념관 남북으로 있는 거대한 전각의 기와는 황제만이 쓸수있다는 황색 기와로 도배되어 있다.
장개석은 75년 죽으면서 황제가 된 듯하다.
아무튼 국부 손중산 기념관에는 늘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대륙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국부기념관을 찾는 이유는
손문이 중화민국의 국부일뿐 아니라 중화인민 공화국의 국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손문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 신 중국 건설에 특별난 기여를 한 것도 아니지만 중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어찌되었건 봉건 왕조를 타도한 신해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민주주의혁명-
신민주주의 공산 혁명이 차례로 일어났고 최종적으로 이 혁명 역사를 이어 받은 정통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
이라고 생각하는거 같다.
그런 이유로 손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중국에서 방영되고 손중산 탄생 몇주기 기념식 같은게 대륙에서
열리기도 하고 그런다.
결국 장개석이나 모택동에 대해선 중국과 대만 양안간에 서로 공비-파시스트라고 비난하지만 손문에 대해서
만큼은 양쪽 모두 국부로 숭상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가면서 이런 양안간의 동일한 국부론에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화민족주의를 전면에 내건 대륙에서 손중산과 그의 사상, 혁명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더해지는 것과 반대로 대만에선 손문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니고 손중산이 없었다면 중국혁명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 모른다는 식에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손중산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었느냐 아니냐를 얘기하진 않겠다.
주제와 상관없고 얘기하다보면 한없이 길어질거 같으니 생략하고 이런 주장이 나오게된 배경과
역사적 흐름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될거 같다.
장개석이 공산군에 쫒겨 수십만 패잔병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패주한 이후 줄곧 타이완은 국민당의 일당독재
상태였다. 국민당 이 외 일체의 정당활동은 불허됐으며 보도와 결사의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87년 해제되기 전까지 전시 비상 계엄령으로 타이완인들을 억압했다.
강압적인 무력 통치 사회가 이완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건 한국과 마찬가지로 최고 지도자의 사망이었다.
1975년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중국사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 장개석이
마침내 사망한 것이다.
국민당 소속 군벌 출신인 옌츠지엔이 임시 총통이 되고 80년 서울의 봄과 마찬가지로 타이완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마침내 기회가 오는듯 보였다.
그러나 10.26 이 후 뭔가 세상이 바뀔줄 알았으나 신군부에 의해 군사 독재가 계속 이어진 한국과 마찬가지로
타이완의 봄은 오지 않았다. 장개석의 장남 장경국이 후계자로 총통 자리를 이어 받고 국민당의 일당독재와
계엄령은 계속 유지되게 된다.
이런 암담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1979년 결국 메이리따오(美麗島:아름다운 섬이란 타이완의 별칭)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한국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군사독재 정권의 흉포함을 폭로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켜 결국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도화선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은 중국 점령군이 아닌 타이완 인에 의한 타이완의 민주주의가 무언이고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시작점이다.
비슷한 환경의 비슷한 모순 속에 촉발된 두 사건은 당연하게도 서로간에 공명을 일으키며 너무나도 비슷하게
두나라 정치환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1979년 5월 반체제 지도자 였던 황신제를 발행인으로 메이리따오(美麗島)란 잡지가 창간된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사들이 모이기 시작해 1979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 기념
집회를 연다. 당국은 무허가를 이유로 집회에 모인 시민들을 무력으로 탄압한다.
군경과 시민 양측에서 수백명의 부상자가 나오게 되었고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된 메이리따오 잡지측
황신제와 류슈롄,야오자원 을 비롯한 8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반란죄로 유죄선고를 받게된다.
(참고로 보도가 통제된 계엄령하에서 국민당 정부 공식 발표는 군경 100여명이 부상입었다는 거뿐이었는데
군경 100여명 부상이면 시민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이 죽고 다쳤는지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엄혹한 독재정권의 군사재판에 맞서 이때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나선 인물이 바로 이후 총통이 된
천수이볜과 2008년 대선에서 민진당 후보라 나섰다가 마잉주에게 진 셰창옌이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 민주인사들과 이들을 변화하는 변호인단은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독재정권의 탄압만이 있었던게 아니라 국민당을 지지하는 외성인들에 의한 백색테러가 무차별적으로
벌어진다.
거기엔 단순 독재 VS 민주의 싸움만이 아니라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퇴각할때 함께
대륙에서 건너와 국민당을 지지하며 본토수복을 외치는 외성인과 국민당의 타이완 점령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와 다를바 없는 외세의 점령일뿐이다라고 생각하는 타이완 토박이 내성인간의 갈등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죄로 기소된 사람 중 린의쓩의 경우 부인과 두딸이 살해당하고 큰딸만 중상을 입고 겨우 살아 남았다.
정도의 차이일뿐 이런 식의 백색테러가 백주 대낮에 공공연히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독재정권의 갖은 고문과 투옥, 백색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틴 이들이 있어 결국 이
메이리따오 사건은 타이완 민주주의의 시작점이자 상징이 된다.
한국의 5.18 민주화 운동 이후 수년이 지나 결국 민주당이 오랜 공백 끝에 재탄생 하였듯 이 메이리따오 사건
이후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국민은 끊임없이 민주화 요구를 한 끝에 결국 국민당은 투항해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고 정당활동과 보도,집회의 자유가 부분적이나마 허용되게 된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투옥된 민주인사들이 가석방 되면서 타이완 최초의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결성되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석방돤 민주인사들은 대부분 메이리따오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있는 사람들이었고
결국 이들에 의해 2000년 첫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바로 천수이볜 총통 취임이다.
비록 천수이볜이 퇴임 후 온갖 스켄들로 감옥까지 가게 됐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 개인 생각을 말하자면
중국과 협력이 필요한 재계, 타이완 독립움직임을 막으려는 중국, 49년부터 계속해서 기득권을 유지해온
국민당세력 이 3자가 연합해 연출 기획한 스켄들이라고 본다. ) 이때의 정권교체는 분명 타이완 인에 의한
타이완 민주주의의 승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민주진보당과 타이완 민주화 진영이 바라보는 타이완 사회의 모순은 국민당이란 대륙에서 온 세력이
반공을 내세워 계엄령을 선포하고 타이완 인의 자유를 탄압한 일본에 의한 식민지 50년과 똑같은 점령과
피점령의 관계적 모순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손중산 역시 중회민국과 중국의 국부가 될순 있지만 타이완의 국부라고 할수 없다고 본다.
아무튼 동아시아 두 나라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공명을 일으키며 전개된 무수한 피흘림 끝에 이룩한
민주주의 역사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대기업 출신으로 서울 시장하고 기득권 세력 대표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
대기업 출신으로 타이베이 시장하고 국민당 기득권 세력 대표로 타이완의 이명박이란 타이틀로
총통이 된 마잉주.
공교롭게도 올해는 한국과 타이완 모두 대선이 있는 해다.
올해 다시 한번 두 나라에서 공명이 일어날까?
------> 공명이 일어나긴 했는데
두 나라 모두 새누리당과 국민당이 승리하고 말았다.
——-뱀발
현 민주당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애매하다고 내가 얘기한적 있다.
그런데 민주당의 전신 한민당이 친일지주에서 유래하든 어쩌든 80년대 중반 새로 결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진 민주당의 새로운 뿌리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유래한다.
이는 메이리따오 사건이 민진당의 뿌리인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