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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 韓國民主黨 ]
요약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우익 인사들이 결성한 대표적인 보수 정당
설립 시기1945년 9월 16일
설립 목적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소재지서울
주요 활동미 군정에 적극 참여, 단정(單政) 추진, 선거 참여 등
8 •15광복 이후 한달 만인 1945년 9월 16일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합당해 만든 보수 정당.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도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지만, 이듬해 초 이승만 노선에 반발해 야당의 길을 걷게 됐다. 약칭 ‘한민당’으로 불리는 한국민주당은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장덕수(張德秀), 조병옥(趙炳玉), 윤보선(尹潽善) 등 우익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진영 결집 세력으로, 독립운동가와 함께 일부 친일파들이 득세한 측면도 있다. 우익진영 대표자 82명은 1945년 9월 4일 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준비위는 이어 1945년 9월 8일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僭稱)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한민당은 창당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옹호했으며, 임정을 중심으로 정통성 있는 정부 수립과 건국(建國)을 목표로 삼았다. 창당일에는 이승만, 김구(金九),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을 영수로 추대했다. 당수 격인 수석총무에는 송진우를 선정했다. 한민당은 창당 전부터 미 군정(軍政)과 관계를 맺었다. 존 하지(John R. Hodgeㆍ1893년 6월 12일~1963년 11월 12일) 중장 휘하의 미 육군 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로 들어왔고, 9월 9일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했다. 그 이튿날인 9월 10일 한민당 계열 인사인 오긍선(吳兢善)이 미군 장교와 접선, 발기 상태인 한민당의 송진우를 소개했다. 미 군정은 또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尹致暎) 등 한민당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들었다. 한민당은 이처럼 미 군정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남한의 실질적인 여당 위치를 확보했다. 한민당은 정부 수립 방안을 놓고 남한에서만이라도 우선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단독정부론(약칭 단정론ㆍ單政論)을 주장한 이승만의 편에 서면서 임시정부와 등을 지게 됐다. 임시정부 측은 ‘단정 반대’를 외치며 남북한을 아우르는 단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정 추진을 지지하면서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한민당 창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에 크게 자극 받았다.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돼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 단체인 건준(建準)은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에 한국국민당과 임정 환국환영국민대회 등 민족주의 세력은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민족진영의 모든 세력을 통합키로 합의하고, 9월 16일 한민당을 창당했다. 한민당 인사들은 미 군정 관계자들에게 “건준을 비롯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에 의해 조직됐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친일 정치인”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당시 건준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한민당은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9석을 확보했다. 임기 2년의 제헌국회의원 198명이 선출된 5월 총선에서는 이승만이 이끈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이나 주도권은 한민당이 한 수 위였다. 한민당은 법학자 유진오(兪鎭午)를 중심으로 내각책임제 헌법 제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막판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바뀌면서 이승만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 수립을 위한 초대 조각 인선에서 한민당이 소외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과 대립이 심화됐다.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했지만, 이승만은 정부수립 후 한민당 계열 인사에게는 재무장관직 1석만 할애했다. 한민당은 이승만과 대립각을 세우고 소장파 의원들이 지도부에 반기를 들면서 당세가 크게 위축됐다. 또 당의 기본 목표인 ‘내각제에 의한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 동조 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49년 2월 10일 신익희(申翼熙) 중심의 대한국민회와 지청천(池靑天) 장군이 이끈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통합,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ㆍ약칭 민국당)을 창당했다. 이후 한민당은 숱한 이합집산과 곡절 끝에 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의 모태가 돼 한국 정당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민당은 핵심 인사의 4분의 3가량이 지주계층 및 자산가, 지식인, 친일파로 구성돼 민중의 지지기반은 약한 편이었다. 보수적인 이들은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았다.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 등이 주요 정강(政綱)이다. 그러나 중공(重工)주의 경제정책 수립과 주요 산업의 국영(國營)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정책은 사회주의 요소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