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2-29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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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정부 시기 - 국내 사정을 알리며 외국에 양해를 구하자는 외교독립론 주장 - 이 주장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함 - 외교 독립론 주장하며 외국에게 국내 사정을 알리자더니 국제 연맹에 우리 정부 권한 위임할테니 통치좀 해달라며 위임 통치를 건의하다 뽀록나서 임시의정원에 탄핵을 받고 파면당함 역시 다른나라한테 정치 대신해달라던 짓이 미국이 처음 아니었음 - 어찌됬던 임시정부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탄핵을 당하시는 명예를 얻게됨 - 구미위원회도 함께 철폐하라고 했으나 이승만의 세력으로 계속 유지하려함 결국 독립때 까지 유지시킴 2. 20만 달러 사건 - 김구에게 장제스가 독립 축하한다며 20만 달러를 축하금으로 줌 - 미군정이 20만 달러의 국내 송환을 거부함 - 김구는 어쩔수 없이 뉴욕의 중국 대사관에 맡겨 나중에 필요할때 말하면 서울로 입금해달라고 요청함 - 이 소식을 어디서 줏어들었는지 이승만이 미국의 중국 대사관에 찾아가서 20만달러를 자기 개인 통장으로 넣어달라는 뻔뻔한 절도를 행하려함 - 장제스가 거부해서 미수로 그침 - 이에 굴하지 않으시고 다시 한번 요구하나 역시나 퇴짜맞음 - 안되겠다 싶었던지 방미 할때 다시 한번 찾아가서 요구함 역시 거절당함 - 역시 박사 답게 머리를 좀더 굴려서 미국서 서울로 다시 귀국할때 상하이를 거쳐서 가기로하고 상하이에 내려서 장제스를 직접 만나 뻔뻔하게 절도를 하시려하였으나 장제스가 만남을 거부함 결국 서울로 감.. - 김구가 10만 달러를 요청하여 10만달러를 지급함, 이에 다급해지신 영감께서는 마누라까지 댓고 중국 영사관을 찾아가서 제발 좀 주세요 라고 사정을함 하지만 결국 끝내 거절당하고 포기함 - 실로 물고 놓지 않는 하이에나 기질이 보임 3. 분단 조성 - 김일성과 함께 자신의 왕국 건설을 주장한 정읍 발언이 일어남 - 김구는 남북이 협력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은 다른 입장 -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 이북의 소련군에게 철퇴를 먹여야한다고 주장함 - 제 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이발언을 하였는데 이것이 이북의 분단을 더더욱 조성하는데 기여함 - 김일성을 이은 대단하신 민족 지도자이심 4. 6.25 전쟁 - 6.25 전쟁이 발발함 - 이 소식에 우리 위대한 대통령 각하께선 6월 27일 서울을 버리고 혼자 대전쪽으로 도망가심 - 그날 저녁 7시 당시 대전방송국의 직무대리를 맡고있던 유병은에게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김장흥이 찾아와 유병은을 충남 지사관으로 데려감 - 지사관의 응접실에 들어서자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있었고 김장흥은 권총을 들이밀며 이승만은 유병은에게 협박을함 - " 이방에서 절대로 나가지말고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방송중계기를 이곳으로 가져오게하고 내가하는 방송을 서울로 보내서 내보내라 그리고 음성을 녹음해뒀다가 밤마다 재반복하라 절대로 내가 대전에서 방송하는걸 누설하지도 말고 아무도 모르게하라 " 라고 명령함 - 이게 그 유명하신 6.27 특별방송임. 당시 방송 내용은 " 모든것이 잘되어가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선 안심하셔도 됩니다. " 라고 내보냈고 대전에서 방송을 하는지 몰랐던 국민들은 결국 피난을 더 지체하게 만든 계기만됨 - 전쟁의 최대참사라 불리우는 6.28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이 일어남 인민군이 새벽에 서울에 입성하였고 이때 당시에도 이승만은 대전에서 생방송으로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개소리를 해댐 - 폭파 사건으로 800명의 국민이 사망하였고 그중 500명이 폭사함 또한 당시 6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 함으로써 국민의 피난길의 유일한 통로를 막았음 거기에다가 병력과 물자 수송에 대한 어려움까지 논란이됨 - 이승만은 이 폭파 사건의 비판이 거세지자 책임을 피하기 위해 8월에 당시 폭파 책임자였던 최장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하여 9월 사형을 집행하였고 죽은 후 12년 뒤 최장식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음 5. 정치적 사건 - 김구 암살 사건 : 안두희가 김구를 죽이고 난뒤 안두희는 체포되었으나 복역 1년만에 풀려났고 그 후 소령까지 진급을 한것은 분명 이승만 정부의 과가 확실하며 이승만이 김구를 죽이지 않았다하여도 안두희를 1년만에 풀어주고 소령까지 진급시킨건 분명 잘못된짓이다. - 반민특위사건 :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이 반공투사다. 그를 풀어주라며 강요하다 반민특위가 거부하자 얼마 뒤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났고 13명의 반민특위 의원들이 수감되었으며 노덕술은 반민특위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풀려났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하지 않았다하여도 이승만이 분명 친일을 살려주려했다는 점이 분명한 잘못이다. - 부산 정치 파동 : 발췌개헌이 주인공인 사건, 이승만이 1952년 전쟁도 안끝난 이때 김일성한테 뒷통수 쎄게 한대 맞으시고 반격으로 살만해지시자 고새를 못참고 정신나간짓을 또 시작한것, 자신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들을 연행하고 발췌개헌안을 군경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통과시켰다 정말로 이사람이 국민을 생각하는 인간인가 의문을 품을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 진보당 사건 :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조봉암이 대선에서 낙선했으나 지지율이 다음 대선 때 위협 될 만큼 높자 진보당 간부들과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 기소하였고 간부들은 무죄 그리고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 사사오입 개헌 : 이승만 정권 때 자유당이 이승만의 독재 체제를 만들기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없엔다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가결을 하기 위해선 한명이 부족했다 이에 135.33.... 명이므로 반올림을 해서 136명으로 통과 할수 있다는 난생 듣도보도 못한 어이없는 개논리를 내세우며 이 법안을 통과 시켰다. 분명히 이부분은 절차적으로 위법의 소지가 존재했다. - 3.15 부정 선거 : 이승만의 득표율이 100%인 엄청난 득표 사건 , 독재를 하기위해 투표함을 바뀌치기 했다가 너무 높게 나오는바람에 개표 도중 수치를 조정하였으나 이미 뽀록이 나서 빡친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이 살상을 목적으로 총격을 했다는 사실이 국회 조사단에 의해서 밝혀졌으나 이승만은 5.18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라는 주장만큼 어이없는 개소리와 비교될 정도로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선동으로 일어난 시위라며 개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 4.19 혁명 : 마산시위 당시 실종 되었던 전북 출신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을 맞고 숨진체 마산 부두에서 발견되자 기자가 이 기사를 보도한후 이를 도화선으로 4월 19일 이승만 하야를 외치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처나왔고 경찰들과 총격전까지 있은 후 이승만은 쫄으셔서 방귀소리에 시원하시겠다는 이기붕을 사퇴 시켰으나 이렇게 해도 안통하자 미국으로 토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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