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회장 임천용)이 12월 20일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1980년 광주사태 때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5.18 때 北특수부대 투입됐었다” -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자유북한군인연합’ 기자회견
그동안 정보통들에게만 쉬쉬하며 공유됐던 1980년 광주사태 때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는 주장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에 의해 공식 제기됐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자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회장 임천용)은 12월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밝히며 “광주사태의 발단과 출발점은 민주화봉기였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했다.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엽합 회장은 그 증거로 ▲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됐고 ▲수많은 시민 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신원 미상자 시체 ▲전기톱에 의해 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탱크·장갑차·윤전기재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의 진의 ▲방위산업체·교도소·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전면전을 불사한 것 등을 언급했다.
그는 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광주사건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며 입수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은 1986년 1월 6일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 상학(수업)에서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 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출처,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
또 김정일도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이 1982년 3월 북한 특전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한 것이며 출처는 교도지도국 각 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라고 밝혔다.
임 대표는 나아가 당시 현장에 투입됐다 북한으로 귀대한 참가자들의 증언을 확보했다며 그들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A씨: 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를 포함해 세 명만 돌아왔다…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내 패거리 싸움식이었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돼 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B씨: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 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위대들이 많이 죽이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했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C씨: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 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임 대표는 “허울을 쓴 민주화 인사들이 북한정권과 입을 맞추며 광주의 희생을 자시들의 정치적 자신으로 역이용하고 특정집단의 상징적인 업보로 선동하고 있다”며 “파괴되는 국가사태 앞에서 더 이상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 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 출신의 최준일씨는 “북한 특수부대 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 전해 들으며 20여 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고 말했다. (이상 데일리안 윤경원 기자 기사 참조)
1980년 연말께 한국에 들어와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은거하며 남한 내 지하당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다 1989년 월북한 거물 여간첩 이선실도 실은, 광주사태가 실패로 끝난 원인을 ‘남한 내 전국 단위의 지하당 부재로 광주사태를 타지역으로 확산시키지 못했기 때문’으로 자체 진단한 북측의 다급한 대남공작 차원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다 급히 남파됐었다. 이선실은 남파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북에서 영웅칭호를 받고 노동당 서열도 높아지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런 내용은 당시 강화도 교동을 통해 이선실을 대동 월북한 전 대남 공작원 김모씨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당이 이선실과 접촉했던 장기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이선실은 대방동 공군회관 뒤 2층 양옥집에 거주하며 재야인사들과 교류하며 수시로 돈을 풀었고, 모 정당 창당 때는 당기를 전달할 정도로 공개적으로 활약하는 등 대범성까지 보였다.
북한 군 출신 고위급 탈북자 L모씨에 의하면, 광주사태 때 내려온 북한군은 황해도 신천에 주둔하는 인민군 특수 8군단 100여명. 증언자에 의하면 남파된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사태 초기 광주에 투입돼 사태를 악화시키는 역할을 부여받고 시민군을 뒤나 옆에서 사상하는 등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민심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했다고 전했다. 공작원의 약 3분의 1 정도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나머지는 귀대했는데 광주를 도화선으로 한 남한 혁명의 실패로 북에서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해 사회불만층으로 존재해 와 언젠가는 터질 뇌관이었다.
필자가 당시 정보 관계자들에게 취재한 결과,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시민군의 상당수가 게엄군의 무기였던 M16 총탄이 아니, 시민군이 예비군 무기 저장고에서 탈취한 M1 총알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주장이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심층 재조사가 필요하다(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당시 정보를 갖고 있는 기무사, 국정원,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관련자들은 이제라도 입을 열길 바란다. 그렇다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당시 쿠데타 세력이나 신군부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북한이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편승해 대남적화를 노렸다는 게 사실이라면 진실이 확실하게 밝혀져 북한 대남공작의 실상이 어느 정도였고, 지금도 멈추지 않는 대남적화 공작의 전모가 낱낱이 공개되길 바란다.
◇자유북한군연합 최중현 참모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이날 밝힌 비밀지령에 따르면 김일성은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 참모장은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속보를 전해 들으며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당시 북한의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며 '그 후로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고 덧붙였다.
최 참모장은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며 '이씨에 따르면 광주사태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 가운데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만이 귀대했다'고 말했다.
(왼편 지프를 탄 5.18난동자들의 사진에서 맨앞의 복면 쓴 무장폭도의 제복을 주시해 보라. 더욱이, 이 폭도가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총은 M-16이요, M-16은 동네 경찰서에서 탈취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모든 광주시민들이 북한을 추종하고 반정부세력을 도와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사람들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몰아가는 일부 극우성향의 사람들도 문제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북한과의 연계가 전혀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다(?)고는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김영삼정부가 너무 성급하게 결론지은 '5.18민주화운동 특별법'이라고 명명한 이 처분적법률 또한
저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명백한 소급효 금지원칙 위반으로 위헌소지가 다분합니다.)
이 법 때문에 '5.18광주사태'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했죠.
현재의 시위처럼 전문시위꾼과 일반시민을 구분하듯이, 그 당시의 상황도 남파간첩과 일반시민들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뭐 그래도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편견을 갖고 세상을 보면 딱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다 넓고 깊은 시야로 세상을 보십시오.
누가 하는 말이 진실이고, 누가하는 말이 얄팍한 선동과 조작이라는 것이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