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반성의 함정이란 학문 용어가 있다.
사람은 먼 미래의 확실한 위험이나 이익보다는
현재의 당장의 작거나 불확실한 위험이나 이익을
더 크게 지각한다는 뜻이다.
말이 좀 어렵나?
간단히 설명하면 흡연함으로 미래에
확실한 위험이 내게 닥칠 것 이지만,
당장 흡연의 즐거움을 더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예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새해 선물로 잊을 수 없는 것을 받았다.
신한국당이었는지 어쨌는지 지금 여당의 그 놈들이
야심한 밤에 안기부법 노동법등의 주요 법안을
날치기통과시킨 것 이었다.
다음날 부터 그 다음해 5월 말 까지
매일 같이 여기저기서 데모가 있었다.
학생운동의 끝물이라던 그 당시에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매일 같이 데모를 했었다.
나 또한 수업 다 때려치고 길거리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여론은 또 데모질이냐는 것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반년 동안을 시도때도 없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집회가 있었으니
'일반 시민'들의 불편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교통은 막히지
데이트하려고 나왔더니 최류탄 냄새에 데이트도 망치지
언론은 언제나 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충실히 하지.
이러니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학점을 포기하며 사생활을 포기하며
당시 일기장에는 내일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들이 종종 나오고 할 정도로
당시는 격렬했었다.
누군들 그 혈기왕성한 시기에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시 여당이 저지른 그 짓은 불의였고
이 나라의 미래를 좀 먹는 짓이라 생각했다.
당장 내 주변의 친한 친구들 마저도
데모 좀 그만 하라고 비아냥댈 정도 였으니까.
그렇게 그 해 뜨겁던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이 지나고
다시 잠시간 평화가 찾아 왔다.
언론에서 수년째 떠드는 것이 있고,
지금은 절대 다수에게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비정규직.
아마 60%에 가까운 봉급쟁이들이
실질적인 비정규직의 굴레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
그 당시 그 날치기 통과는 지금의 비정규직을 양산한
단초를 제공한 것 이었다.
당시 거리를 뜨겁게 메우던 사람들도,
그런 그들을 비난하던 이들도,
적어도 절반 이상은 지금 비정규직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날치기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도 못 했고 또 알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내가 불편한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현재 그 때 느낀 불편의
몇 배는 더 불편하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춘의 몇 계절을 통으로 날려 먹은
나는 지금 그 덫에 걸려 있지는 않다.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았던 당시인지라
많은 동네친구들은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전문대를 가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는 했었다.
서울이고 나름 대학진학률이 높은 지역 중에
하나였는데도 그랬다.
당시 모이면 그렇게 비아냥대던 친구들 중
월급쟁이의 태반은 비정규직이거나 파견근로 등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다수는 아직도
당시 그들이 그렇게 비웃던 그 일이
지금 자신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 단초였다는 것을
모른다.
나도 예수나 공자같은 성인이 이닌지라
아주 가끔은 이기적인 생각에 피식 웃는다.
" 야이 멍청한 놈들아 이게
니네 무관심과 비아냥의 댓가다."
스스로 흠짓 놀라지만 아주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정말 웃긴 것은 어느 정도 소득 수준이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쩌면 자신과 관계 없을 일에
더 열을 내고 행동을 하려고 하는 반면,
정작 소득도 불안정하고 낮은 이들이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일임에도 무관심하거나
반대자들을 욕한다.
그리고는 술 마시면 빌어먹을 세상탓을 하지.
그런데 그 빌어먹을 세상을 만든 것이
빌어먹을 자신의 손모가지 인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