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대출신 주성하기자 이번 유감사태 칼럼
2004년 6월 남북간 ‘전선지역 선전중단과 선전수단 제거 합의’는 내가 보았던 최악의 남북협상 사례다.
이는 북한이 회담 탁자에만 앉으면 집요하게 요구했던 사안이었다. 전방 수십만 명 군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 북한은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이걸 노무현 정부는 서해 남북 통신망 연결 등과 바꾸었다. 북한 측에선 이런 큰 선물을 정말 공짜로 얻은 게 맞는가 싶어 어리둥절했을 법하다.
반대로 말하면 당시 정부는 정말 요긴한 것을 얻어낼 수 있었던 엄청난 카드를 버린 어리석은 짓을 한 셈이다. 서해 통신망은 얼마 뒤 무용지물이 됐다.
당시 “남북 화해를 위해선 비방 방송은 물론 상호 협박도 중단해야 한다. 북한 장사정포가 전진 배치돼 서울을 겨누는데 어떻게 화해를 말하겠냐. 서로 포병을 뒤로 물리자”고 제안했다면 북한이 선뜻 받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최고 존엄의 권위’와 직결되는 확성기 방송 중단이 몇 배로 더 시급한 일이다.
북한이 전멸 위험을 감수하면서 장사정포를 휴전선에 바짝 붙인 것은 순전히 협박용이다.
우리는 이 장사정포들에 대응하기 위해 수조 원의 세금을 써왔다. 대응 포병대대 창설, 전술지휘통제자동화체계 구축, 레이더와 정찰기 구매 등에 든 예산이다.
보도블록 다시 까는 걸 예산낭비라고 분노하면서 수조 원 아낄 수 있는 카드를 그냥 버린 건 누구도 모른다.
대북 협상은 고도의 전문적 영역이다. 하지만 실현가능성은 둘째 치고서라도, 카테고리조차 엉성한 지난해 3월의 드레스덴 선언을 보곤 나는 이 정부에도 기대를 버렸다.
이번 고위급 접촉에 수십 년 동안 대남분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김양건의 맞수로 김관진 홍용표 투 톱이 나선 것을 보면서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가 중요하고 물러설 일이 아니다”고 확신 있게 말하니 “실현가능성 없는 저런 공언을 왜 할까” 의아하면서도 믿는 구석이 있나 싶었다. 결과적으론 믿은 내가 잘못이었다.
어차피 북한이 유감 표명 이상을 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유감 수용과 확성기 중단 카드로 적잖게 얻어낼 것이라 생각했다.
최소한 “북측은 유감을 표명하고, 남북은 재발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에 세계평화공원을 설치하고 경원선 복원에 착수한다” 정도는 기대했었다.
그건 대통령이 원하는 사안이었고 확성기 중단을 위해서라면 북한이 기꺼이 받을 거라 봤다. 중앙방송에서 ‘대한민국’ 명칭까지 불러주는, 안하던 파격적 ‘성의’까지 보이며 매달린 북한이 아닌가.
그런데 합의안은 온통 북한에 끌려간 흔적뿐이었다. 북한은 확성기 중단 목표를 달성했고 부수적으로 한국 정부가 막고 있던 민간교류의 빗장도 풀었다.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흉물로 변한 금강산면회소를 남측이 새로 리모델링해주고, 이를 금강산 관광 재개의 물꼬로 활용할 수 있으니 북한으로서도 원하던 거래일 것이다.
이런 합의 만드느라 회담장 박차고 나오는 시늉 한번 못한 채 나흘이나 잡혀있었고, 나와선 큰 걸 얻었다고 자화자찬이다.
새벽 2시에 합의 발표를 보다가 “남측은 모든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에 “북측은 동시에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하였다”는 구절이 따라붙자 한숨만 나왔다.
마치 방송 중단에 북한이 준전시 해제로 보답하는 모양새다. “남북이 경계태세를 동시에 낮춘다”도 아니고, 저 조항은 왜 넣었을까.
준전시 해제하든지 말든지. 안하면 북한만 고생 아닌가.
논란이 된, ‘유감’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 유감이 사과의 뜻이라고 우리 정부가 나서서 구구절절 강변해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북측은 박왕자 씨가 총에 맞아 사망한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 남측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한다.”
“북측은 천안함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사망한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남측은 5·24조치를 해제한다.”
이런 유감 두 번이면 북한은 그토록 원하던 것을 다 얻게 된다. 유감으로 때우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것이야 말로 북한이 이번에 얻은 진짜 소득일지 모른다.
이것이 수십 명 장병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에 우리가 주고 싶어 했던 교훈이고 응징인가.
비정상적인 사태에 확성기 방송을 다시 한다는 합의조항도 자랑할게 못된다. 그럼 북한과 합의하지 않으면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수 없기라도 하단 말인가.
앞으로 당국회담을 이어간다니 큰일이다. 확성기 중단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음에도 못한 세계평화공원이나 경원선 연결 사안을 그때 꺼내놓으면 북한은 매번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아마추어 협상력으론 안줘도 되는 돈 얼마나 더 퍼줘야 할지 견적이 안나온다.
시장경제 사회에서 산 사람들이 왜 북한 앞에선 실리 챙기는 법을 잊어버릴까. 나아가 당하고도 당한 줄 모르니 그게 더 큰 문제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1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