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항, 그 존재만으로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하는 조항(<헌법해의>: 11)이 들어간 것일까? 혹시 제헌헌법을 좌파들이 모여 만들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좌파는 5ㆍ10선거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고, 중간파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들었다. 이익분배균점권을 제헌헌법에 집어넣을 것을 주장한 세력은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대한노총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전평’ 등 좌파 노동운동세력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노동단체의 간판을 내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승흠에 따르면 노동자의 이익균점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구체적인 주장을 한 정치지도자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자본과 노동이 평균이익을 누리게 하자는 주장”을 “제헌국회의 헌법심의 중에서 그것도 이익균점권 논의에서” 한 것이다. 아무리 이승만이라 한들 국민생활의 균등한 보장을 추구하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직후 좌파 노동운동세력은 장기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구했겠지만, 당장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장의 정상적인 가동을 목표로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에 힘을 쏟았다. 제헌국회에서 가장 강력히 이익분배균점권을 주장한 문시환에 따르면 이미 여러 기업에서 기업가들이 이익의 분배를 솔선해서 실시하고 있었다. 우파 노동운동세력도 이미 자주관리와 이익의 분배를 실현하고 있는 현장의 열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이미 여러 사기업에서 기업가들이 솔선해서 노동자들과 이익을 나눠 갖는 상황이 이익분배균점권으로 실현된 것이다. 사실 대한노총 출신 일부 의원들은 노동4권을 넘어 노동자의 경영참여권을 포함한 노동5권을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대한노총 위원장으로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은 이익분배균점권을 “대한민국헌법 이외에 세계 어느 나라 헌법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일대 창견일 뿐 아니라 인류평화의 암이요, 세계적 난문제이니 노자대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 개 관건”(<건국이념>: )이라고 찬양했다.
제헌헌법 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3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불어 이 책이 1백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의가 무엇인지 꼭 하버드대학 교수에게 물어보아야 했을까? 우리 제헌헌법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사회 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모든 국민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상태를 사회정의가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으면 돈 없어서 못 먹고, 돈 없어서 못 배우고, 돈 없어서 아픈데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뜻이다. 유진오는 그러한 사회를 한편에서는 좋은 밥을 먹고 따뜻한 옷을 입는 국민이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에 신음하는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함은 “최저생활을 확보한다는 의미보다는 넓으며 생리적 최저생활을 확보하는 동시에 상당한 정도의 문화적 생활을 확보할 것을 의미”했다. (<헌법해의>: 178) 대한민국 재건의 주역들은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도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와 책임 (한홍구 역사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