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진보세력보다 더 빨갰던 원조 보수들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87조의 중요산업 국영ㆍ공영 원칙에 대해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이 조항은 소련이나 전시 중화민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헌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정으로 “우리나라 헌법의 진보성을 표현한 규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규정만으로 볼 때에는 우리나라는 국가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채용하였다 할 수 있다”(<헌법해의>: 183) 고 주장했다.
제헌헌법의 이와 같은 규정은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 기간산업 및 사회 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고 규정한 통합진보당 강령 11항과 비교해볼 때도,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의 상당수가 이미 재벌의 손에 장악된 오늘날의 현실과 비추어볼 때도 대단히 급진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유진오의 지적처럼 일견 사회주의적으로까지 보이는 급진적인 내용을 왜 우파들이 제헌헌법에 담았던 것일까?
첫째,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볼 때 한반도에 존재하는 자본의 94퍼센트가 일본인 또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기관 소유였다. 94퍼센트라면 중요산업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산업은 다 적들이 남기고 간 재산, 즉 ‘적산’(또는 귀속재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적산은 조선사람 전체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당연히 조선사람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했다. 영어 잘한다고, 미국 유학 갔다 왔다고, 얼른 이름을 존이나 메리로 바꾸었다고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 독립운동시기 좌ㆍ우익을 막론하고 주요한 정당과 단체는 모두 해방 후 새롭게 건설할 국가는 마땅히 중요산업의 국유 또는 국영을 주장했다.
셋째, 국내의 자본가 계급이나 우익 인사들 입장에서 볼 때 중요산업 국유화가 당장 자신들에게 타격을 주는 일은 아니었다. 주요 기업의 대부분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제국주의 국가기관에 의해 국영 내지는 공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일본인 개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몰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산업을 국영화한다 해도 한국 국적을 가진 개인이 기업을 무상 또는 유상으로 강제 매상당하는 일은 일어날리 만무했다. 유진오는 “헌법에서 중요기업을 국영으로 한다 하면 우리나라 경제 체제에 중대한 변혁을 가져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아무런 변혁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고” 라는 식으로 한민당의 김성수를 설득했고, 김성수도 이에 쉽게 동의했다고 회고했다. (<헌법기초회고록>: 30)
넷째, 중요산업 국유화라는 시대적인 요구를 거역하고 특정인에게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적산 불하를 강행할 경우 민중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우익인사들의 입장에서는 공산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민중들의 급진적인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와 책임 (한홍구 역사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