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지주 중심 정당
한국민주당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태동하였다. 전라남도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광활한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 대지주들이 많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보다 일찍 한민당 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초 광주에서 한민당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김양수(순천), 서민호(별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41] 그러나 한민당에 참여한 인물들이 외국 유학파와 김성수의 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 경성방직 관련자들 그리고 자본가들이었기 때문에,[138][144] 한민당은 이승만이나 임정을 봉대하지 않고서는 당세를 확장시킬 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한민당 총재 취임을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이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 활동을 구상하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또한 한민당은 임정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00만 원을 만들어 이를 정치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임정에 전달했지만 임정은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받는 한민당으로부터의 후원을 거절하였다. 따라서 한민당은 당 활동의 구심점을 마련할 수 없었다.[41] 요컨대 한민당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두 전라도 출신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세가 전라도에 고착되어 호남 지주 중심의 정당이 된 것은 사실이다.[145]
한민당의 주요 인사는 김성수(전북 고창, 동아일보), 김병로(전북 고창, 탈당), 백관수(전북 고창, 탈당), 나용균(전북 정읍), 이석주(李錫柱; 전북 전주), 송진우(전남 담양, 동아일보), 정광호(전남 광주), 홍성하(전남 광산), 백남훈(전남 담양), 김준연(전남영암), 이철승(전북 전주), 김용무(전남 무안), 김양수(전남순천), 서민호(전남 고흥) 외에도, 장덕수(황해남도, 동아일보), 함상훈(황해남도, 동아일보), 백낙준(평안북도), 원세훈(서울, 탈당), 이기붕(서울, 탈당), 김도연(서울), 구자옥(경기 광주), 임영신(충남 금산, 탈당), 유진산(충남 금산), 윤보선(충남 아산), 유진희(충남 예산), 윤치영(충남 아산, 탈당), 조병옥(충남 천안), 장택상(경북 칠곡), 조헌영(경북 영양), 송남헌(경북 문경, 탈당), 이활(경북 영천), 서상일(대구), 이인(대구), 최윤동(대구), 김재학(金載學; 경남 통영), 김효석(경남 합천, 탈당), 이길용(李吉用; 경남 마산, 동아일보), 허정(부산, 탈당), 김약수(부산, 탈당) 등이 있었다.[144]
1948년 7월 30일 한민당에 이승만파와 호남파 간의 갈등이 있었는데,[112] 이는 결국 1948년 8월 2일 윤치영의 한국민주당을 탈당과 8월 3일 정현모 등 9명의 국회의원의 탈당으로 이어졌다.[74]
1950년 4월 29일 각 당·단체 대표 좌담회에서 경향신문 소속 사회자는 구자흥에게 "세상에서는 전라도가 민국당의 금성탕지(金城蕩地, 쇠로 만든 성과, 그 둘레에 파 놓은 뜨거운 물로 가득 찬 못이라는 뜻으로, 방어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성을 이르는 말)라고들 하는데 이 점 구 선생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말했다.[146]
1950년 5월 27일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전라도를 "민주국민당의 요새"라고 표현하였다.[147]
다만 허정은 한민당을 가리켜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니 친일파의 소굴이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의 찬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79] 조병옥은 '송진우나 김성수는 정당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나 또는 당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지방적인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 본위 실력 본위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특히 정당 및 사회단체 조직에 있어서는 그런 점에 가장 유의하고 세심한 검토로서 전력을 다하여 주력하였던 것이다'며 지역 정당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