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되었던 한국 독립군은 각자도생 방식으로 일본군 포위망을 간신히 탈출했다. 이때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을 조직한 이동휘가 “한국 독립군이 자유시로 들어오면 레닌 정부가 도와주기로 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대일한로공수동맹(?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했다. 조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를 수용하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무장 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코민테른 자금을 받은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이후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휘는 “대한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라고 제안했으며,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있는 국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지음·이준형 옮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106쪽). 또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
임정을 탈퇴한 이동휘는 간도·연해주의 한국인 무장 부대를 시베리아 영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홍범도를 비롯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 부대는 4,500여 명. 이들 중 홍범도·최진동·안무·이청천 등을 비롯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은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절반 정도는 적군 산하로의 편입을 거부하자 소비에트 정부는 자신들의 명을 따르지 않는 한국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명령한다. 1921년 6월 28일, 소비에트 정부는 적군 편입을 거부한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공격했다. 홍범도, 이청천 등도 동료를 학살하는 소비에트 적군 편에 가담한 사실이 여러 사료를 통해 밝혀졌다.
김홍일은 자유시 참변 당시 희생된 한국 독립군은 700~800명, 부상자 수백 명, 벌목장으로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었다고 주장한다(김홍일, 『대륙의 분노』, 문조사, 1972, 106쪽). 적군의 포로가 된 독립군은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노역 형에 처해졌다(박영석, 『한국독립군 병사의 항일전투』, 박영사, 1984, 179~181쪽).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로 기록된 ‘자유시 참변’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한국 무장 독립군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독립운동 연구자들은 열심히 연구해 놓고도 왜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