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본래 밝은 성품을 등지면서
본래의 나를 잃고
결국 유무와 주객의 분상으로 나아가가게 되는
근본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전도몽상의 세계인
육도를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중생의 업을 행하지 않는다고
윤회를 그치고
무아를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대지와 허공처럼
중생은 근본무명의 생양과 포용으로 존재하기에
이러한 소승적 무아를 성취함을 넘어서서
세상이 본래 무아임을 깨닫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승적 무아의 중생 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위법적 사고수준 내에서 중생업을 소멸시킨다는 뜻으로서
아직 애고를 벗어나지 못한 세계관이며
유무 단상과 주객 분별의 핵심원인인
중생의 근본무명을 제거해야만 비로서
대승불교의 세계관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이고 이세상의 긍극의 진실인
본래 무아의 여실지견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아무런 행을 하지 않는 행을 하는 것일 뿐
본래 어떠한 행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주법계의 실상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에 두루하고
온갖 묘용이 자제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본래의 자기 모습을 드려내지 않고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하며
역력한
영원한 나이면서도
실상은 나라던가 남이라던가 있다던가 없다던가의 분별
이전의 밝은작용이
여관의 주인입니다
우주의 근원적 실상의 모습을
나그네의 지혜 곧 반야로
깨달음의 세계를 밝게 비추는 것이
부처님이 중생에게 보이시려고 했던
'여래 진실의'입니다
무아의 이해로 소승불교가 기반한다면
무아의 실증으로 여래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무아를 이해하고 무아로 나아가는 실천행을 하는 것은 올바른 수행자이지만
무아를 분별하고 무아를 실제로는 부정하며 무아상에 집착하는 것은 올바른 수행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본래무물이기에 먼지를 제거하면서도 먼지를 제거했다는 상에 집착하면 않되며
(대승 반야바라밀행)
본래무물이이게 먼지를 떠나지 않아도 먼지를 벗어날 수 있어야 하며
(해탈 열반)
본래무물이기에 먼지를 통해 중생의 먼지를 제거해주는 방편행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불보살과 조사 선지식의 무위행)
본래무물이 주인고
본래무물이라고 아는 것이
지혜로운 나그네일 것입니다
여관의 주인은 무상 무아 무주인 중생 개개의 본래 성품이며
나그네는 지혜의 빛으로 이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아를 인정한다는 것은
본래무아를 밝혀야 가능한 것이며
조사관을 넘어서고
중도묘용의 묘각의 단계에서야
드러나는 구경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도나 중국의 동양사상은
이러한 긍극의 깨달음에는 미치지 못하며
여전히 전도몽상의 중생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에
전도몽상에서 깨어난 여실지견의
불보살과 조사의 가르침과는 격이 다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