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中>>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닦는가? 이른바 온갖 희론의 경계를 쉬어 없애는 것이 지(止)요, 인과와 생멸의 모습을 분명히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각기 따로따로 닦아서 차즘 늘어나서 성취하게 되면 자유로이 쌍으로 수행한다. 지(止)를 닦으려는 이는 고요한 곳에 가부좌(跏趺坐)를 틀되 몸은 단정하고 뜻은 바르게 하며, 기운과 호흡에 의지하지 말고, 형상과 빛에도 의지하지 말고 허공에도 의지하지 말고 지ㆍ수ㆍ화ㆍ풍에도 의지하지 말고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기능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 분별과 상념(想念)을 모두 제거하고는 제거했다는 생각마저도 제거할지니, 온갖 법은 불생불멸이어서 모두가 일정한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앞의 마음이 경계를 의지하거든 이내 경계를 버리고 뒤의 생각이 마음을 의지하거든 다시 마음을 버리며, 마음이 바깥 경계로 달리거든 곧 거두어들여 속마음에 머물러 두라. 그런 뒤에 다시 마음이 일어나거든 마음이란 상에 집착하지 말지니, 진여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ㆍ주ㆍ좌ㆍ와 언제나 이와 같이 수행하여 항상 끊이지 않으면 차츰차츰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서 마침내는 온갖 번뇌를 굴복시키고 신심이 늘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속히 이루겠거니와 만일 의심 내는 마음이 있어 비방하여 믿지 않거나 업장에 끄달려 아만과 게으름에 빠진 이들은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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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에 들어 고요한 상태로 있음을 버리고 다시 생각을 받고 분별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가 자비심이기 때문에 적멸을 깨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일정한 상(相)이 없는 제행무상또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적멸에만 머무르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참 자유, 해탈)이 아닙니다.
이렇게 상(相)을 다시 받되 받는 상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이 이루어 집니다.
진여(眞如)를 떠나서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인과법에 따라
마장이 있어야 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며, 마장 또한 불법(佛法)에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마장이 있어야만 극복할 대상이 있는 것이며, 이래야 지혜가 구족됩니다.
이 세상은 모든것이 상대적이며 상대성(相對性)이 절대성(絕對性)입니다.
절대적인 선한의지가 모든 상대적인 자유의지들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일화(世界一花)요, 일미법문(一味法門, 한 맛의 법문)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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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中>>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染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켜 모든 염법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 무명은 바로 진여를 훈습하나니, 이미 훈습한 뒤에는 망념(妄念)이 생긴다. 이 망념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망령된 경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망념으로 훈습하는 힘 때문에 갖가지 차별된 집착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은 갖가지 과보를 받는다.
-중략-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眞如)로 무명에 훈습하는 것이니,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념심(妄念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게 한다. 이렇듯 망심으로 싫어하거나 구하는 인연으로 다시 진여를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어 그 본 성품이 청정함을 스스로 믿고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였을 뿐이어서 끝내 실체가 없는 줄로 안다.
<<승만경 中>>
13. 깨끗한 제 성품[自性淸淨]
"세존이시여, 생사(生死)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을 의지할 것이니, 여래장인 까닭으로 그 비롯한 때[本際]를 알 수 없다 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음으로 해서 생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훌륭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난다, 죽는다 하는 생사라는 것은 바깥 것을 받아들이는 근(根)이 없어지고, 받아들이는 근이 차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을 생사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죽는다, 난다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법이 곧 여래장인데, 세간의 말로 말하므로 죽는다, 난다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근(根)이 망가지는 것이요, 난다는 것은 새로운 근이 생기는 것일지언정, 여래장이 나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여래장은 유위의 모양을 여의었으므로, 여래장은 항상 머물러 있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의지할 데며, 거두어 지니는 것이며, 세워 일으키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은 여의지 않고, 끊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 부사의한 불법이므로, 세존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고 달라지는 여러 가지 유위법의 의지가 되고 거두어 지니고 세워 일으키는 것이 곧 여래장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래장이 없으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게 여겨 구할 수 없나니, 그 까닭을 말하면, 지금 있는 6식(識)과 이 알음알이 지혜[心法智]와의 일곱 가지 법은 잠깐도 머물러 있지 못하므로 모든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게 여겨 구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전제(前際)가 없어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법이므로 모든 괴로움을 심으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게 여겨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