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기술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정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것과 실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실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란
역사서를 쓰는 이의 주관을 배제하고 역사속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조선왕조실록등이 있다.
반면
정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란
특정한 사건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모든 사건은 특정한 사건을 일어나게 하기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보고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기 전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또는
2차세계대전은 한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일어난 것 이라고 본다면 이는 정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다.
정사적 관점에서 서술된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
글쓴이가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서론에서 역사의 기술방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정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운명론적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를 짚고 넘어 가기 위함이다.
또한
운명론적 관점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을 부여한 상위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인류가 남긴 대부분의 역사서는 정사적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운명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만약에 누군가가 올 해 여름휴가는 하와이에서 보내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사람의 올 해 여름 휴가철의 운명은 결정된 것으로 보아도 되는 것인가?
물론 여러가지 상황 변동이나 천재지변으로 그 사람이 하와이를 못 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의 가정을 좀 다르게 설정해 보자.
나는 반드시 올 여름 휴가를 하와이에서 보낼 것이다.
그 어떤 상황변동이 있더라도 심지어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하와이까지 헤엄쳐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올 여름 휴가를 하와이에서 보낼것이다라고 그 사람이 결심을 하였다면 그사람의 올 해 여름 휴가철에 있어서 그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위의 예에서
어떠한 사람의 결심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글쓴이가 위의 예를 통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결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즉 자유의지에 의한 결심의 강도에 비례하여 그 사람의 미래의 운명이 선명해 진다는 것이다.
물론 운명이라는 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들어
내가 동양인으로 태어 난다는 것, 한국의 남자로 태어 난다는 것 등과 같이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못한 채 부여된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부여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모든 상황들을
내가 태어 나기 전의 "나", 즉 상위차원에서의 나에 의한 선택이라면 어찌되는 것인가?
상위차원의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자유의지에 따라 계획하고 선택한 것일 것이고
상위차원의 나는 하위차원의 나보다 월등히 완벽한 존재일 것이기에 하위차원의 나는 그의 계획에 따른 선택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이 가정해 본다면
운명이라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은 하위차원의 나에게도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상위차원의 나는 하위차원의 나보다 월등히 우월한 존재일 것이므로 하위차원의 나는 상위차원의 나의 계획에 따른 선택에 이의 없이 순응하면 될 것인데 문제는 하위차원의 나에게도 자유의지가 주어짐으로써 상위차원의 나의 선택에 반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하위차원의 나는 상위차원의 나의 선택에 따른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겠지만...
따라서
하위차원의 나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위차원의 나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위차원의 나를 어떠한 지점까지 이동시키는 것이 하위차원의 나를 통하여 이루어 낼 상위차원의 나의 목적의 전부라면 하위차원의 나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은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하위차원의 나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상위차원의 나가 하위차원의 나를 통하여 이루려 하는 것이 하위차원의 나를 단순히 어느 지점까지 이동시키려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위차원의 나가 하위차원의 나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함으로써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과정속에서의 체험과 그 체험을 통하여 얻게 되는 "느낌"에 있다.
하위차원인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런 고민없이 주어진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이 우리에게서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서 바라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의 느낌들 이다.
절대적 존재인 창조주가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전제적으로는 상대적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있고, 궁극적으로는 상대적 존재에게 있어서 나(신)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글쓴이의 존재의 이유라는 글을 통하여 알아보기 바란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하위차원의 나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어진 길을 걸어 갈 때 그 과정 속에서 느끼게 되는 수많은 고민들, 기쁨들, 고통들, 쾌락들... 이 모든 느낌들을 수집하는 것이 상위차원의 나의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가학자인가?
그가 간접체험자라면 그를 가학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간접체험자가 아닌 직접 체험자이다.
직접 체험이어야만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을 가학자라 말 할 수는 없다.
글쓴이는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 한 "하늘에 기댄다"라는 표현을 무척 좋아한다.
이는 하늘에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다가 힘들 때 하늘에 기대어 잠시 쉬어 간다는 의미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고단한 삶 속에서 하늘이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중용에서는
그것을 알고 삶을 살아가는 이를 대인(大人)이라하였고
그것을 모르고 삶을 살아가는 이를 소인(小人)이라 하였다.
주어진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