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정신적 불만족이 가까운 원인입니다. 마음은 대상을 향해서만 일어나는 것이기에, 분노가 일어난 대상에 분노의 본질이 있다면 그 분노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분노라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해탈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기본적인 논리는 그러합니다.
야동을 못보면 불만족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야동을 못보게 만든 대상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문제는 그 대상에게 분노를 일으키게하는 본질, 즉 '아'가 있냐는 겁니다. 여성들에게는 야동을 못보게 만드는 그 대상이 기쁨과 환희의 대상입니다. 남성에게는 불만족의 원인이지만 여성에게는 기쁨의 원인이 됩니다. 감각적 원인 만으로 따져보아도 그렇다는겁니다.
누구에게는 기쁨의 대상이고, 나에게는 불만족의 대상이 된다면 그 대상의 본질은 무엇이냐고 부처님이 묻습니다. 대상의 본질이 기쁨도 분노도 아니라면 왜 나는 그것에 분노를 느끼는 것인 지에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냐, 바람이 부는 것이냐, 혹은 니 마음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무얼까요?
프로이드는 잠재의식이 성욕에 기반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만해도 엄청난 내적탐구의 결과물입니다. 존경받을만한 일이지요. 성적인 욕망의 불만족으로 기쁨과 불만족이 갈린다는 내적 탐구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시지요. 성이란 것이 그런 기쁨과 불만족을 일으킬 수있는 본질이 있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그걸 본능이라는 것으로 뭉뚱그려 피할 수없는 본질이라고 여겼지만 부처님은 그것이 내 마음으로 지은 허상일 뿐이라고 보셨습니다. 야동에대해 본질을 특정할 수 없듯이 성적인 것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마음이 나, 자아,에고인가에대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답은 우리가 해야되겠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붓다는 명확하게 정의를 내려두셨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마음이라는, 우리가 통상 뭉뚱그려 인식하는 그것을 해체하신 것이다보니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거나 사유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모호한 듯 보이는거란 뜻입니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선 너무나 분명한 것이지만 우리들은 그것 자체를 분별하기가 어렵다는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깨달았다면...하고 말씀을 드린거지만, 사실 내가 그걸 깨달았다하더라도 여전히 듣는 상대방은 이게 뭐야? 하겠지요.ㅎ ㅎ
그냥 기분 좋고, 우울하고, 화나고 등등이 '내 마음'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뜬금없이 마음은 이러하고 마음 부수는 또 어떠하며 행위자가, 도구가 어쩌구하는 말들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도 않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기 마련이죠. 그렇다고해서 용어의 의미가 모호한건 아닙니다. 듣는 우리가 생소하기에 느끼는 감정일 뿐일겁니다.
우리말 마음 자체가 상당히 범주가 넓습니다. 몸과 마음이라고 할 때의 마음을 불교에서는 크게 수상행식으로 나눕니다.
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느낌, 감각이며
상은 우리가 대상에 대한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상, 걸상, 밥상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식은 대상을 아는 작용입니다.
행에는 온갖 잡다한 마음의 작용들이 포함되며, 논장에서는 마음부수라고 하여
60여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습니다.
기분은 마음부수에 포함되며, 흔히 말하는 '마음'이란 단어에 포괄되는 요소입니다.
잠재의식도 대상에대해 생긴 것이라고 불교에서는 봅니다. 안이비설신의 여섯기관이 모두 사라진 깊은 잠에 빠진 상태에서 우린 기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우울하거나 즐거운 기분도 어떤 대상에대해 일어난 마음이 잠재의식화되어 있는거라고 보지요.
우울한 기분에 빠져있다가도 급똥 마려워 달려가서 시원하게 배출시키면 기분이 잠시나마 좋아지지요.ㅎㅎ 자기도 잘알지 못하는 대상에서 배설이라는 대상으로 마음이 전향되었기때문입니다. 물론, 배설보다도 우울함의 대상이 더 강하게 남아있으면 똥 누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볼 일보고 나오기도 하지요. 대상이 바꼈든 아니든 대상은 존재하는거지요.
나의 감각기관인 전오근-안이비설신-과는 감각접촉으로 대상을 인식하게되지요. 뭐 오문전향? 받아들이는, 조사하는 마음 등과 속행, 등록
등의 복잡한 인식과정을 불교에서는 제시합니다. 그중 자극의 강도가 약한 대상은 일곱번의 속행을 다 마치지 못하고 다시 잠재의식(바왕가)로 진행이되며 그런 경우에는 우리 기억에 남지를 않지만 적어도 인식은 일어났다고보지요.
대상없음은 기본적인 접촉이 없었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대상은 존재하는거란 반론이 있겠지요. 다만 불교적 인식에서는 대상의 없음은 그렇게 규정될거라는 내 개인적 판단일 뿐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