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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을 궁극적 실체라는 아트만과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
[기고] 홍창성 교수의 불성론을 비판한다
홍 교수는 불성이 연기론·무아론·무상론에 위배된다고 주장
‘열반경’ 등 수많은 경전에서 불성을 공성·연기·중도로 설명
심의식 긍정성 드러내 성불 향한 원력 갖도록 하려는 의도
[심연] [오전 4:10]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와 불교의 불성(佛性)의 가장 궁극적인 차이점은. 대자대비심과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힌두교 범아일여에는 자비와 자유가 없습니다. 공(空)에 귀속되는 것에 무슨 자유가 있을리가 없죠.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은 대자대비심을 증득하여 대자유를 찾는 것이죠.
[심연] [오전 4:13] 자비가 있기 때문에 중생계에 하생도 하고 두려움 없이 중생구제 하러 지옥도 가는 것이죠. 이게 진짜 자유로운 것이죠. 그냥 세간을 다 떠나면 그게 자유입니까? 세간이 무서워서 떠난 것이며, 두려움이라는 미세망상이 남은 것이죠.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이라는 것에 어긋납니다. 해탈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대보적경 中>
제일의인 자비심 닦으라.
<대반열반경 中>
여래가 곧 자비희사(慈悲喜捨)요, 자비희사가 곧 해탈이요, 해탈이 곧 열반이요, 열반이 곧 자비희사라 하였거늘, 이런 이치를 분별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였다 이름하느니라.
<<대반열반경 中>>
번뇌 허물 미리부터 아시지만
중생들을 위하여서 거기 계시며
오래전에 세간에서 해탈을 얻으시고도
생사에 나시는 건 자비의 연고.
<대보적경 中>
또 사리불아,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서원에서 물러나지 않고 부처님의 세계를 장엄하고 깨끗하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지옥의 고통을 들을지라도 대비(大悲)만을 일으켜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축생의 고통을 들을지라도 대비만을 일으켜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아귀의 고통을 들을지라도 대비만을 일으켜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모든 하늘의 쇠뇌(衰惱)를 들을지라도 대비만을 일으켜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인간 세계의 굶주림과 도둑과 원수와 살해 등의 일을 들을지라도 대비만을 일으켜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
<대반열반경 中>
보살마하살은 지옥에 갈 업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서 서원을 세우고 지옥에 나느니라. 선남자여, 지나간 옛적 중생의 수명이 백세이던 때에,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중생들이 지옥의 업보를 받았으므로, 내가 그것을 보고 큰 서원을 세우고 지옥의 몸을 받았느니라. 보살이 그 때에 그런 업이 없었지만, 중생을 위하여서 지옥의 과보를 받은 것이니라. 내가 그 때에 지옥에서 한량없는 세월을 지내면서 죄인들을 위하여 12부경을 널리 분별하여 말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경을 듣고는 악한 과보를 깨뜨려서 지옥이 비게 되었는데, 일천체들은 제외하였으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현생도 다음 생도 후생도 아니면서 나쁜 업보를 받는다고 이름하느니라.
<앙굴마라경 中>
여래는 매우 자비로운 분이며 두려움이 없는 자리에 계시므로 중생들을 라훌라같이 평등하게 보아서 모든 질병을 구원하고 고쳐 주며 의지할 데가 없는 이에게 의지가 되어 주신다.
<대반열반경 中>
또 해탈은 모든 생사를 여의고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온갖 즐거움을 얻으며,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영원히 끊고 모든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니, 번뇌의 뿌리를 뽑은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모든 함이 있는 법을 끊고, 온갖 무루(無漏)의 선근을 내며 여러 갈래를 막음이라 하나니, 이른바 나다, 내가 없다, 내가 아니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는 데서, 다만 집착만 끊고 나란 소견을 끊지 않는 것이다. 나란 소견은 불성이요 불성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대반열반경 中>
무엇을 이치라 하느냐. 내가 없는 것은 생사요 나라는 것은 여래며, 무상이라는 것은 성문 연각이요, 항상한 것은 여래의 법신(法身)이며, 괴로운 것은 모든 외도들이요 즐거운 것은 열반이며, 부정한 것은 함이 있는 법이요 깨끗한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가지는 바른 법이니라. 이것은 뒤바뀌지 아니한 것이니, 뒤바뀌지 아니하였으므로 글자도 알고 이치도 안다 함이니라. 만일 네 가지 뒤바뀜을 멀리 여의려거든 마땅히 여래의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대승기신론소 中 원효스님 저>>
부처님의 경지에서 발현하는 모든 공덕 가운데서, 여래는 오로지 대비만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이 '대비'만을 제시하여 '부처라는 인격[佛人]'을 드러내었다. 예컨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범인(凡人)과 성인의 힘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이 여섯 가지 힘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어린아이는 울음으로써 힘을 삼으니, 마음 속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선 울음부터 터뜨린다. 여인은 성냄으로써 힘을 삼으니, 성내고 난 뒤에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참는 것으로써 힘을 삼으니, 항상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챙긴 뒤에 할 말을 한다. 국왕은 교만함으로써 힘을 삼으니, 큰 세력[豪勢]을 가지고 할 말을 한다. 아라한(阿羅漢)은 한결같은 정진(精進)으로써 힘을 삼아서 할 말을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로써 힘을 삼아서 중생에게 널리 이익 되게 한다." 이로써 모든 부처님은 대비로써 힘을 삼기 때문에 부처님의 '인격'을 표시하려고 '대비자'라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 세 구절로 불보(佛寶)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법화경 中>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그 뜻이 이해하기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내가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 법을 연설하지만,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능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부처님들만이 아시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다만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찌하여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다만 일대사인연으로써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말하느냐? 부처님 세존들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려는[示]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려는[悟]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의 도에 들게 하려는[入] 연고로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부처님들께서 일대사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부처님 여래들께서는 다만 보살을 교화하며, 여러 가지 하는 것도 항상 한 가지 일만을 위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견으로써 중생들에게 보여 깨닫게 하는 것이니라.
사리불아, 여래는 다만 1불승(佛乘)만을 위하여 중생들에게 말하는 것이지, 다른 2승(乘)이나 3승은 없느니라. 사리불아, 모든 시방세계 여러 부처님들의 법도 역시 그러하니라.
사리불아, 과거의 여러 부처님들께서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 인연이나 비유의 이야기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연설하셨으니, 이 법이 다 1불승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을 따라 법을 듣고 필경에는 모두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