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불교는 이게 뭐야? 하면서 세상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파고들지만
대승불교는 이거 다 공이야~ 하고 퉁쳐버립니다. 소승이 분석적이라면
대승은 통합적이랄까요? 둘 중 어디가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중생의 근기에 맞고 인연에 맞는 법에 따라 수행할 뿐입니다.
소승과 대승의 법 또한 법화경에서 설하는, 철 모르고 불난 집에서 놀고 있는 중생을
탈출시키기 위한 미끼이며 다양한 장난감 중에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 불교 사상의 핵심은 공입니다. 오온이 공함을 보면 깨닫는다지요.
반야바라밀다심경, 줄여서 반야심경에 그 정수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만 보통 앞의 색즉시공 공즉시색만
알아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그 뒷 구절까지
다 봐야 뜻이 제대로 풀이가 됩니다. 색만 공이 아니라 수상행식
또한 공이라는 것인데 이미 그 앞에서도 '조견 오온개공' 이라면서
색수상행식, 즉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뜻의 반복인 것이지요.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색수상행식을 보는 것은 곧, 공을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뒤의 구절을 보면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앞에서는 공이 색수상행식 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공에는 색수상행식 이 없다하네요? 뭘까? 싶습니다.
이 뒤에서도 계속 공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도 없고
의식의 세계 등등 모든 것이 없다 합니다. 삼계라 하는
욕계, 색계, 무색계 이런 게 다 공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세상 모든 것이 공에 속하지만 정작 그 공이라는 것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공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본성을 되찾아 우리가 공해지면 세상 모든 것이
공에 속하는 것이니 세상 모든 것이 나에 속하겠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공이라면서 공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표현은
언어의 한계입니다. 직접 깨달음의 상태에 들어가서
공을 체험해나가야 제대로 알 수 있겠지요. 수행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그 어떤 공에 대한 이해도 다 틀린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뱀의 발자국을 그려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