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은 쓰지않겠다, 쓰더라도 내가 직접 본 후에 쓰겠다 여겼는데, 요 며칠 무위니 열반이니, 존재니 주체니하는 경험하지도, 할 수도없는 것에대한 중구난방의 글들이 올라와 불교에대한 인식이 왜곡될 가능성이 보여 간단히 정리해두고자 합니다. 출세간-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를 벗어난-은 욕계에 머물고있는 나로선 이해할 수도 없고, 본적없는 것이기에 최대한 경전에 의거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출세간이니 무위니하는 것들은 우리들의 인식으로는 알 수없는 것들입니다. 경험한 적이 없으니 저런 것들이 다 구라다 라는 주장에대해 직접적 경험으로 반박할 수도 없고, 경험했더라도 꺼내 보일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하지요. 물론, 불교에선 무조건적 믿음이 아닌 스스로의 깊은 사유 후 진리라는 확신에서 오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의심이 생기면 믿지마라 주의입니다.ㅎㅎ
열반은 무위법입니다. 세상의 궁극적 법들인 구경법은 마음,마음부수,물질,열반이 있습니다. 저 안의 몇몇가지에대해 분류를 다르게 하는 소소한 차이 말고는 대승이나 상좌부나 다 똑같습니다. 그중 앞의 세가지는 형성된 유위법, 열반은 무위법이라 부릅니다. 무위라 하니 이게 뭐야? 싶겠지만 말 그대로 '의도 없음'이고 그래서 형성되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다.
문제는 한글로 풀어두면 더 헷갈린다는겁니다. 의도란 말은 알지만 정확한 의미를 모르기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착각과 상상이 펼쳐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너무 방대하기에 짧게 설명합니다. 의도는 바라는 목적성을 가집니다. 좋아서 가지고싶거나 싫어서 멀리하고픈 생각들이죠. 그런 의도가 업이 됩니다.
행동의 결과 만이 업이되는 것이 아니기에 좋아서 가지고싶다라는 마음만 먹어도 업이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마음, 마음 하는겁니다. 12연기에 갈애와 취, 즉 취착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그것이 존재인 유를 형성하고 그 유가 다음 세상의 생, 태어남의 조건이 됩니다. 상좌부에선 재생연결식같은 것으로 설명하지만 기니까 패쓰.ㅎㅎ
어쨋든 저런 갈애-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싫어함도 갈앱니다-에 의해 윤회가 생기니 그것을 소멸시키면 곧 해탈이 됩니다. 탐진치의 소멸, 갈애의 소멸, 역으로 의도의 사라짐, 무명이 소멸됨 등으로 해탈을 다양하게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갈애란 것이 없어져라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데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작용에서 인식에대한 연구를합니다. 또 기니까 패쓰.ㅎㅎ 어쨋든 대상과의 접촉 이후 바왕가의 동요...조사...받아들임, 속행...바왕가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과정을 보여주고 그 중 속행에 이르는, 즉 의도의 생성,업의 생성을 막는 방법을 말하게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사마타처럼 대상을 표상으로 만들어 전향과 조사 등은 일어나더라도 속행을 막는 삼매 수행은 그래서 마음청정, 즉 심해탈 수행입니다. 대승에서 止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선정수행은 무한히 지속될수 없기에 觀, 즉 위빳사나 수행, 지혜수행이 더불어 가야합니다. 여기서 지혜란 막연히 상상하는 지혜가 아닙니다. 늘 그런 부분에서 다툼이 생깁니다만, 여기서 지혜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지혜, 생성과 소멸을 아는 지혜, 묶어서 아는지혜(통찰지) 등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심해탈과 혜해탈의 양면해탈을 하셨기에 오온중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과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이 멸한 상수멸 경지라고 합니다. 병신이라서 인식과 느낌을 못느끼는게 아니라 그것이 업으로 남는 속행이 일어나지않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가 멍때리는 병신 아니냔 망상은 그만하도록합시다.ㅎㅎ
아, 길다...아직 십분지 일도 못썼는데...ㅎㅎ
결론으로 갑니다. 그래서 그런 갈애를 일으키는 근본이유가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때문이니 나를 오온으로 분해하여 공함을 보여주셨고, 공하니 없는건가하는 허무주의의 뿌리인 단멸도 배척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번뇌가'소멸'된 자리에 드러난 것이 열반이기에 그것은 형성된 것이 아닌 무위입니다. 그래서 열반은 소멸도 없습니다. 무상과 고가 아닌 이유입니다. 그러나 역시 열반도 무아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무명으로 덮힌 것들이 사라져서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걸 불성, 자성이라 대승에선 부릅니다. 얻고자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원래 내포된 것이라 보는거지요.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란 말이 생긴겁니다. 상좌부 불교도 다를게 없습니다. 다만 둘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을뿐 근본은 똑같습니다.
뭐 대충 그렇다는 이야깁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