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어떤분이 믿음 소망 사랑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20년 이상을 교회에 출퇴근하면서 보고 겪고 들은 세 단어의 정의에 대한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것들의 정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전혀 다른 단어이고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믿음. 기독경 전반을 꿰뚫는 개념이자 가장 먼저 등장한 개념입니다.
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미치광이 신의 정신나간 명령에도 주저함 없이 아들을 잡아 죽이려 한 아브라함의 일화는 신도들에게 굳건한 믿음의 표본으로서 언제나 인기리에 언급되는 일화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믿음 이후로 나오는 소망이 성립하기 위해선 믿음이라는 단계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뭐 이 부분은 나중에 소망 애기 할 때 따로 하기로 하죠.
교회에서 믿음에 대한 일화로 주로 사용하는 장면이 서너개 있는데 위에 언급한 '아브라함의 이삭잡기'와 '당신이 말만 해도 내 종의 병이 나을 것이다' 라고 말한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바다에 집어 던질 수 있다' 라는 예수의 언급이 주로 인용됩니다.
이 외에도 지붕을 뜯어서 환자를 내려보낸 A특공대 이야기나 옷 자락만 잡아도 병이 나을거라 믿었던 한 여인의 일화도 있지만 일일히 다 소개하자면 지면이 모자라니 넘어갑니다.
이 믿음이라는 개념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믿음의 전제조건으로 '맹목적이고 의심없는'이 붙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는 겁니다.
왜 자꾸 뇌 없는 리빙데드가 나타나는가? 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하고 지니고 있는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거세당한체 교회에서 하는 말에 아멘만 외치는 살아있는 시체들이 발생하는 이유도, 작금의 교회가 뿜어내는 온갖 문제에도 신도들이 나서서 개혁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믿음이 신도들에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주장하는 믿음 소망 사랑중에서도 가장 병X같고 가장 병폐가 큰 개념입니다.
소망.
과거 이스라엘은 빵셔틀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영토도 없어서 떠돌아다녔고 나중엔 에굽땅에서 민족 전체가 노예생활을 했죠.
이 기간에 싹이 튼 것이 메시아, 구원자 신앙입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고 노예가 된 자기들을 이끌고 에굽을 出해줄 구원자.
지금에 와선 사후 자신들을 낙원으로 이끌어 줄 존재에 대한 희망이 교회에서 주장하는 소망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네가 죽으면 발할라로 이끌어 주겠다 -임XX X-
누구랑 많이 비슷하죠?
어쨋든 이 소망에는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소망은 믿음을 떼어놓고는 성립 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거쳐야만 소망은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일종의 부속개념이라고 할 수 있죠.
신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 신앙은 소망의 형태로 발전합니다. 훗날 주어질 보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 말이죠.
과거엔 신앙의 대가로 땅과 탈노예를 약속했고, 지금은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구원자 교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솔직히 까고 말해서 지금 너의 모든것-빤스라던가 인감이라던가-를 바치면 미래에 너의 소망-천국행-이 이뤄질 것이다, 라는 일종의 보험상품인데 놀랍게도 이 보험상품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지급사실이 증명 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과 소망은 이 놀라운 불공정거래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교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죠.
예수의 가르침중 으뜸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지들 말이 그래요. 사랑이 으뜸이라고.
그럼 니들이 이 따위로 굴면 안되지, 씨足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