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는
절대자인 신을 무조건 믿고 따르자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신앙이 아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의 본질을 깨닫고 깨달은 대로 생각하고 살려하는 수도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그것은 철학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의미부여인 사색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즉 "행복을 얻기 위하여 본질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인류사 2500년 동안 인류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도 몇 백 년 전부터 굉장한 철학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사실 서양철학이 자연과학이나 인본 실존 등 제대로 된 철학에 눈 뜬 이후
불교는 충격처럼 다가간 것이다. 그 이전에 서양도 무지했다)
불교철학이 사실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평가되어지는데
그러함에 따라 그에 영향받는 분야는 단지 종교생활 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리.화학이나 정신의학 예술 쪽 등 전반적이다.
더구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만약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구태여 반대나 저항의 태도는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내부의
소승(=개인의 구원에 관심), 대승(=나뿐 아니라 타인의 구원에도 관심)의 입장 차이가
더더욱 도드라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부처님 혹은 불교의 본질 혹은 정수란 무엇일까.
.행복하게 살자이다
.그를 위해 생의 본질을 제대로 알자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空 (빌 공), 윤회론에 있다.
윤회론은
이승에서 의지를 가지고 행한 행위가 곧 다음 생에서 업으로 작용하니
베풀면서 자비롭게 살아라하는 말이다...그러나 이 말은 부처님이 하지 않은 말이라고도 하고..
논란이 있다.
공(空)
(=사실은 이것이 불교이론의 핵심이며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면서도 쉬운
만물과 철학의 본질 그 자체이다.)
왕자로 태어난 석가는
매우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성품이 짙은 자였고
자라면서 보게되는 인간의 생로병사 즉 고통과 괴로움에 대하여
왜? 무엇이? 어떻게? 라는 처절한 고뇌를 하게 되고..
드디어
보리수 아래에서 전우주를 관통하며 인류에게 주어지는 빛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이 곧 "공"이라는 것이다.
제자에게 말씀하시길
'이 세상에는 겨우 손톱끝으로 잡아 들어 올릴만한 실체적 존재물조차 발견할 수가 없도다'
(실체적 존재물= 영원불멸 혹은 절대적인 존재..)
인간주변에 영원불멸의 것 즉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것에 기대어 볼만도 하지만(그것이 신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그러한 것은 없고
보이고 생각되어지는 모든 것은 단지 현상일뿐이다.
존재함이 없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도 공허다.
인간도 태어나면 언젠간 죽어 사라진다.
크게 보면 우주안의 모든 물질 시간 공간이 다 그렇다.
보고 느끼고 그리고 그걸 토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너 자신은 ...너의 삶이 존재하는 순간은..그리고 너의 눈에 직접 보이고 만져지는
이 물질들은...틀림없이 실제하는 거라 믿겠지만
정확한 본질은 찰라에 존재하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즉
(생각으로는)찰라적으로는 실체적 존재가 맞지만... 그 본질이 곧 공이다.
실체적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공이라는 것이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러한 너 나 그리고 시간과 공간..물체들은 다 무엇인가.
다 공에서 출발하여 어느 한순간의 인연으로 맺어져 눈에 보이는 형상이 된 것이다.
그러니 너와 나는 다름이 아니고
(마치 큰 바다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파도는 ..파도입장에서 보면
각 각 별개의 실체이고 너와 나가 구별 되지만, 바다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이고
모두가 의미없이 잠깐 찰나에 존재하는 현상이.. 곧 파도 이듯이)
(그러니 空이 곧 완벽한 의미에서의 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없음과 있음이 같아지는 수준을 곧 공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것은..곧 바다에 대한 파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바다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수없이 윤회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그 윤회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나만의 단순한 생각으로는..바다란..
바로 그러한 현상 자체의 속성 아닐까 한다.
어차피 인간에게는 그것은 미지의 세계이며 어찌 해 불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니 만큼
그것에 구애 될 것은 아니고..
단지 벗어 날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깨달음의 핵심은 곧 지혜다.
그리하면 열반에 든다. 즉 윤회를 벗어 날 수 있게 된다.
물질과 에너지는 분명 다르게 보이지만...
서로간에 모습을 바꾸는 경계점이 있어야 물질.시공간의 우주가 성립된다고 본다면
사실은 물질도 에너지이며 더 더욱 본질은 물질이나 에너지도
사실은 (최소한 이러한 관념속에서는)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 관념속에서 우리의 눈앞에서
분명 존재를 가지고 현상을 나타낸다.
더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왜냐면 어찌됐든 ..
현실속에서는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또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둘 다 진실이니까..
그리고 어쨌든 그 둘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것..
이니만큼.....그 사실을 모순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일뿐..이니까)
삶과 죽음 즉 나타나고 사라짐도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도, 그 고통과 불행만큼은 마치 정말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처럼
받들고 살려한다.
그걸 벗어 나라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욕심이다.
이별의 아픔은 만남에서 나오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 아닌 공허다. 그러니 산은 물이요 또 산이요..그럴 수 있는 것이다
중요치 않다는 말이고
산을 산으로 보면 산이고 물로 보면 그것도 맞다는 소리다.
또 .. 삶과 태어남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불교의 입장은 당연히 아니다.
태어난 것도..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렇다해도 행복하게 즐겁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주어졌다.
모든 걸 헤쳐나가는 힘은..
'지혜'에서 나온다.
날 속박하는 것은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는 지혜...
마하반야심경..
(마하=거대한, 반야=지혜..로 피안=깨달음의 세계 즉 극락에 가자는 내용이다.)
==============
대충 밥도 안 먹는 상태에서 대충 몇 마디 주워들은 풍으로 떠들어 본 것이니
불교에 깊은 지식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틀린 부분 지적과 가르침을 주시옵고
일반인분들도 오해하지 마시길...
허기가 져 눈앞이 빙빙도니 우선 공양부터 해결함이
곧 부처님 뜻이 아닐까하여..식사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