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생(영원)에 대해 관심없는 그리스도인? - 영생은 영생하는 생명이 주어진 시점 부터 시작된다. 죽은 후 부터가 아니다.
죽은 후 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설령 그들이 크리스찬 이라고 해도 사실상 나눌 대화가 없다.(죽은 후에나 대화가 가능할까?)
영생의 삶, 영원으로 잇대어지는 삶은 아무리 인생을 달관한 노인 일지라도 전혀 새로운 삶이다. 과거의 숭고해 보이는 사랑과 도덕성과 선행들이 아무리 선해 보일지라도 멸망 받을(불에 태워질) 것이라면 이제 영생하는 생명으로의 행위들은 그야말로 영원으로 이어진다. 같아 보이는 행동이라도 썩어질 것과 영원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들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이 얼마나 흥미 진진한가. 썩어질 사랑을 해 왔다면 이제는 썩어지지 않을 사랑을 심을 때다. 영원의 세계에 가지고 들어갈 것들을 챙길때다. 사랑과 애착과 감동들을 챙기자. 자식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사라질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모두가 살아 있을 것이다. 영생하는 생명으로 심은 것이라면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셨지만 사람들(제자들)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심지어 손에 못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 조차도 남아 있어서 그 상처를 영광스럽게 여기시지 않았는가.
그 분은 썩어질 것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신 것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도 썩어질 것을 버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심어야 한다. 새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영생하는 생명으로의 삶은 한마디로 흥분되는 모험이다. 심고 경작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의 것이 된다. 이 신비롭고도 생소한 삶에 대해서 정말이지 우리는 나눌 것이 많다.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나눌 새로운 대화들이 얼마나 많은가. 궁금한 것도 많을 것이다. 영생과 영원한 것들...에 관해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들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교회' 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지 않고 썩어져 가는 구습으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가 나누어야 할 삶은 구태스런 퇴물 (과거의 육체) 의 것이 아니라 영생하는 새로운 생명의 삶에 관한 것이다. 겉보기에 똑같은 삶을 말하면서도 영생을 바라보는 자는(의식하는자는) 영생의 것으로 이야기 하고 육체를 바라보는 자는 육체의 것으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것으로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땅엣 것으로 이해하며 듣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인생 달관하는 법을 설파하는 곳이 아니다.
영생하는 생명을 부여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시작하게 된,
새로운 삶에 대해 피차 나누고 격려하는 그런 곳이다.
썩어져 가는 구습이 아니라 썩어지지 않을 영원한 것에
주목하게 하는 곳이다.
방향 제시 분명히 하자 !
썩어질 것으로 심지 말고 썩어지지 않을 영원한 것으로 심자.
무엇을 심을지는 당신이 무엇을 주목하느냐에 달려 있다. 육체를 주목하는 자는 육체로 심고 영을 주목하는 자는 영으로 심는다. 육체를 주목하는 자는 육체를 신뢰하고 영과 생명(새로 주어진)을 주목하는 자는 영을 신뢰한다.당신의 믿음에 달려 있다. 어떤 믿음인가?
당신은 정말로 영생을 가졌다고 믿는가?
아니면 장차 가질 것이라고 믿는가(이런 신앙인들과는 대화할 것이 없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복음7:38]
2016.9.12
바위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