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종교/철학 게시판
 
작성일 : 17-08-24 20:34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자식 1
 글쓴이 : 공짜쿠폰
조회 : 766  

80년대 초반의 글이나 지금 현재 상황과도 완전히 맞아 떨어지며, 역사문제는 세월의 변화와는 무관하니 읽어보시면 좋을 듯.


엄멀히 말하자면 종철게에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본의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도 한구절 언급되니 일본 신도와도 한발 걸쳐 있으니 안될 것도 없다고 보임. ㅋ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사진 왼쪽)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6과 #7이 앨런 코벨의 글).




비록 20여 년 전 씌어진 글이지만 오늘날 일본의 행보를 정확하게 내다봤을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제3국 학자의 냉철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림. 그림


①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의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② 백제 근초고왕 때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7개 곁가지가 있는 칼 ‘칠지도’.




 


[#1]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자민당 내 헌법조사위원회는 현행 헌법에 대한 다양한 개정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을 서슴지 않고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이 삭제된다는 것은, 1920년대 전후에 그러했듯이 군부 세력의 득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현행 일본헌법 제4조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준다. 현행 일본헌법 4조는 ‘천황은 국가적 문제에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日王’의 부활?




1920~30년대에 ‘신성 천황’ 개념은 일본 군부가 녹슨 칼 휘두르듯 내세우던 구호였다. 천황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던 군부는 ‘만세일계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이름으로 각종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금(1982년) 그런 것처럼, 교과서 내용을 왜곡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국신화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청동기 문화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화내용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일본보다 더 일찍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석기시대 일본으로 이주해 가면서 우수한 무기와 건국신화도 따라서 이동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현상으로, 앞선 문화와 앞선 기술의 무기를 가진 민족은 늘 그보다 못한 민족을 정복했다.




역사왜곡 또한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보다 정직한 미술사를 선호한다. 중국 역사가들이 남긴 전형에서 보듯, 새 왕조를 연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전 왕조를 비난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를 아예 사상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는데, 옛 소련이나 북한이 책을 정직하게 기술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에 비해 일본과 서독은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민주국가라는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이나 난징 대학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독일이 히틀러를 영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왕에게 아무 권력도 없던 중세에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팽창정책에 천황이 이용되면서, 일본의 교과서는 선전도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자민당은 일왕을 상징적 존재 이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 그 실현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본인들은 이를 ‘국내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다. 불행하게도, 수백만명이 그것이 일본 내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임을 알고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한때 아시아 8개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여타 국가에도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세계의 문제’였다.





악명 떨치던 일본 경찰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곤국가이던 1920년대에도 군국주의의 대두는 그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세계 제2의 부국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는 백배 더 가공할 사태를 불러올 것이다. 한때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경찰을 두려워했다. 한낱 동네 경찰이라 해도 일본에서조차 1930년대의 양식 있는 시민에게는 막강한 군부세력의 말단조직원으로 진정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여행길에 배의 상갑판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천황의 초상화를 싣고 가는 배의 상갑판에 올라간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억지로 내려서야 했다. 또 말이 날뛰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일왕비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남자는 ‘신성한’ 왕비의 비단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일본은 정말 ‘신성’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히로히토 천황이 취미인 물고기 표본에 심취하는 팔순의 멋진 노인으로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란다.







[#2]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잇달아 2년간 한국식 솔직함과 일본식 편의(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거짓말하는 것)의 차이를 경험할 기회가 왔다. 하와이대에서 1975년 여름에는 일본 후류(風流) 연구여행을, 1976년에는 한국의 풍류 연구여행을 지원한 것이다. ‘후류’와 ‘풍류’ 모두 한자로 ‘風流’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풍류’라는 말을 격하시켰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해도 지식인층에서 맥이 이어졌다.




미학적이며 심리적인 이 단어의 첫 글자는 ‘바람’이라는 뜻이고, 다음 글자는 ‘흐른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후류를 연구하는 동안 중국 시인 왕웨이(王維), 타오위안밍(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시를 읽었다. 그 시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떠나 매화나 달의 아름다움을 찾는 선승의 검박한 생활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속물적인 도락이었다.




또한 후류 연구를 위해 일본에서 가장 섬세하다는 음식점 몇 군데를 소개받았다. 모두 후류의 자부심을 뽐내는 곳이었는데, 아름다운 솔밭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가에 앉아 조그만 히바치(화로) 위에 끓여낸, 한입거리도 안 되게 적은 세 숟갈의 생선요리를 먹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눈으로 즐기기 딱 좋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너무도 적은 양이었다. 그들은 그것은 ‘대단한 후류’라고 설명했다.




다음해인 1976년 여름에 접한 한국의 풍류는 보다 명확해 보였다. 풍류는 엘리트를 위한 절묘한 음식맛이 아니라 시인 김삿갓이나 기생 황진이가 그런 것처럼 솔직하고 매인 데 없이 사물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에는 ‘인생은 흘러가는 것, 머잖아 죽음이 올 테니 우리는 살아가야지’ 하는 실존적 느낌의 움직임이 가득했다.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작의성(Contrivance) 또는 호벤, 솔직함이 없고 자연스러움도 없는 이 기질은 일본인의 성격에 배어난다. 그러니 일본 교육부가 나서서 (교과서 왜곡을 두고) 사죄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떻게 해야 일본인들이 솔직해질까. 1300여 년에 이르는 한일관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어떻게 해야 그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솔직해질 것인가.





교과서 왜곡과 전쟁 징후




나는 일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신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사이러스 피크 교수는 원자폭탄의 끔찍한 경험이 겨우 일본헌법의 전쟁금지 조항을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썼다. 이후 신세대가 성장했고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는 데 힘입어 일본의 1인당 소득수준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이제(1982년 현재) 세계인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파워가 서서히 고개 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이 일반 일본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 또한 일생을 이중적 얼굴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한국인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사회규범은 엄격하기 짝이 없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자민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신군국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 뻔하다. 그것도 점점 더 대담하게 말이다.




아무도 고등학교 교과서 쓰인 몇 줄 글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곧 군인 적령기가 된다. 노골적으로 군을 미화하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일본 당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나설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3] 조지 샘슨에게 배운 일본사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곡옥,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1920~30년 군국세력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공짜쿠폰 17-08-24 20:45
 
위에서 이어짐

1920~30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내가 샘슨 경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로 불리던 일왕 중에도 15세기에는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씨를 써서 팔아 연명하던 사람도 있다.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14세기에는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적통 장자의 후손은 지금(1982년 현재)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Miel 18-06-03 22:01
 
 
 
Total 4,894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종교/철학 게시판 규정 가생이 04-29 44144
4769 ※충돌※ 드디어 허경영과 종교학자들이 만났다 피 튀기는? 즐겁다 10-14 576
4768 일본황실은 한민족의 신을 섬기었다. 유위자 10-12 612
4767 끄덕이는 노래 - 드렁큰 타이거 blackclover 10-12 401
4766 [ TIMELESS ] - 드렁큰 타이거 blackclover 10-12 479
4765 예언 2 유란시아 10-10 818
4764 예언 1 유란시아 10-10 649
4763 부처의 연기법 - 법륜을 굴린다는 의미 (5) 유전 10-06 559
4762 (대화) 진리에 관한 고담준론. TXT. (5) 유전 10-04 537
4761 아라한 경지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증득하는 방법 (4) 유전 10-01 591
4760 붓다가 된 음악가 (5) 방랑노Zㅐ 10-01 607
4759 중도와 중관의 차이점. (17) 어비스 09-24 775
4758 거짓말 하지 않았다! 그 머리로는 잘났다 할 수 없었을 것인데... 태지2 09-21 569
4757 모든 악행과 과보는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은 결과임 (3) 유전 09-20 614
4756 사냥꾼 2탄. 인디언 전쟁 - 오해와 편견으로 시작된 비극 방랑노Zㅐ 09-16 499
4755 어느 사냥꾼의 고독 방랑노Zㅐ 09-16 437
4754 공여래장 불공여래장 (8) 유전 09-15 730
4753 불설 오온식경 (1) 후아유05 09-13 416
4752 천년동안의 사랑 (4) 방랑노Zㅐ 09-13 592
4751 아촉불의 45대 서원,, (4) 후아유05 09-12 507
4750 불교수행 교학정리 (1) 유위자 09-12 425
4749 진리의 영이 인간으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 (7) 유전 09-12 556
4748 불설일체여래금강삼업최상비밀대교왕경 유전 09-11 335
4747 여래에게는 여래장이 있다 후아유05 09-10 321
4746 기독교의 윤회사상 (5) 유위자 09-09 549
4745 정신병 걸린자식 vs 애 안 낳는 자식 (1) 중도적입장 09-08 460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