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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24 20:42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자식 2
 글쓴이 : 공짜쿠폰
조회 : 485  

판소리를 말살하려던 이유




그렇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712년에 씌어진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9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4] “일본을 좋아하나 신뢰하진 않는다”




“매켄지. 그도 한때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그가 쓴 장문의 글이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고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사하는 사설이 실린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일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황색 저널리스트’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랜슬럿 로슨의 ‘극동의 제국들’ 중에서)




“매켄지는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 중 유일하게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짓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E. J 해리슨)




매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글을 남겼던가. 그야말로 일본이 새로 내놓은 역사책이 거짓투성이임을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도우려고’ 저지른 한일강제합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본 교과서 논쟁이 한참인 오늘날(1982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여기 인용해 본다.




“일본은 한국인을 억누르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식민정치를 시작했다. 민(民)과 융합하지 않고는 훌륭한 행정을 도모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통치하고 모욕을 주는데 융화는 불가능하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국가적 이상을 파괴하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과 양식을 뿌리뽑으며, 얼마든지 거저 부려먹을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한국인을 과소평가했다. 외교와 사회분야에서 일본은 전세계를 마치 어린애인 양 취급했다. 일본인은 한껏 미화하고 한국인은 무능력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본 문명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한국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저 노동력 착취 대상인 열등인간으로 대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을 전시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건축물을 공들여 세우고 철도를 부설해 국가 경제력은 무시한 채 시설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것들로, 오직 일본인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을 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잊었다. 미성년자들은 때리고, 성인들은 감옥에 보내고 엄벌을 내려 몰아세움으로써 황국신민이 되라고 충성을 강요했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이 반역자들을 키워왔음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에 한국문화를 깡그리 섬멸하고 일본어를 선뜻 배우려들지 않는 한국인들을 족쳤다.”




매켄지는 일본 순사가 어떤 집이든 멋대로 수색하고 누구든 재판 없이도 벌주는 데 대해 썼다. 그들은 사람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물리적 고통의 한계가 ‘하루에 태형 30대(대나무 두 개를 묶어서)씩 사흘 연속 90대’이고 그 이상은 고통이 극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계산을 해냈다. 1916년의 공식 보고서에는 8만2121명이 그런 체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후에는 이런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3만2830명이 감옥에 갇혔다.





불온사상, 코끼리 이야기




일본이 이른바 ‘불온사상’이라고 간주한 사례 중에는 영국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한 키플링의 유명한 코끼리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는 두 번째 주인을 따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이것을 한국의 아이들에게 두 번째 주인인 천황을 받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은 한국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도구였다. 조선은행은 모든 종류의 통화를 관장하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을 마련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땅을 파는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은 자들에게 이전 가격의 20%밖에 안 되는 헐값에 땅을 넘겼다. 이렇게 땅의 원 경작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일본은 ‘농업을 개량’했다.




난징 대학살도 일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일본은 후손에게 일본인들이 갸륵한 이타심을 발휘해 황인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사회 저변을 발전시킬 소명을 떠안았던 것이라고 가르치려나 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극동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 점이다.




나는 1930년부터 일본어와 그 문화, 역사를 연구해왔기에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나는 1930년 이래 일본예술사를 진작시킨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쓰공이 주는 메달과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시코쿠섬이 해군기지인 것을 모르고 카메라를 갖고 그곳에 갔다가 가택연금되면서 동전의 다른 면도 잘 알게 됐다.




나는 시코쿠섬을 멀리 떨어진 연인들의 소풍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 섬에 발 디딘 나를 그들이 매우 수상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 헌병은 내가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감시하고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따라왔다(프라이버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인을 아주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쓴 일본은 그들의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5] 1930년대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가




1930년대에 나는 일본에 살면서 과거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어와 일본 예술, 문화를 더 공부했다. 일본사회에 나 자신을 투영해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학의 대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느라 기모노를 입고 다비와 조리를 신었다. 서양식으로 발달한 내 신체에 이런 차림으로 도쿄 요코하마간 급행열차를 타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던 시절은 악몽 같다.




일본에 있는 동안 두 분의 스승을 알게 됐다. 나보다 갑절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지만 모두 영어가 유창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문기자였는데 천조대신 신사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 해서 불경죄로 심한 처벌을 받고는 기자직을 버리고 ‘안전한 직업’인 사업가가 됐다. 그는 지금 다이마루백화점의 사장이 되어 이를 서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다른 스승 후쿠이 리키시로 교수는 1920년대에 ‘15세기 일본의 유명한 수묵화가 중 몇 사람은 사실 한국인이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나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예술사에 박학한 그는 도쿄대학의 최고 교수직을 맡고 있었지만 그 발표 이후 이단으로 몰려 북동부 센다이의 도호쿠대학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의 연구발표는 일본학계에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때 그의 문하생 중 보수파 한 사람은 도쿄박물관장이 됐고, 서양인 문하생인 나는 그의 진보적 가르침을 좇는 미술사가가 되어 지금 서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자 일본 태생의 한국인 학생 하나는 내 강의를 ‘아집’으로 간주했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1930년대 일본에서 살았고 당시의 지배적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그때와 똑같은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군국주의, 또는 네오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은 같은 것이니까. 선량한 일본사람들은 1930년대의 그러한 군국주의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 밤, 나는 일본공보관에서 다몬 마에다 관장과 얘기를 나눴다. 미국 FBI 관계자가 1시간 전쯤 그곳에 와 있다가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관장은 책상 유리판 위에서 무슨 서류를 태우고 있었다. 관장은 한마디로 충성스런 일본인이었다. 그는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패전 후 유일하게 그가 도쿄시장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관장과 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았다.


“이건 무서운 실수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군부가 저 잘났다고 그러는 거요. 시민은 그 사람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20~40년대의 정신을 되풀이하려는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과연 군부의 도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극동문제의 중심축은 한국




처음에 나는 이번(1982년) 교과서 왜곡파동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리라고 봤지만, 자세히 검토하면서 의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을 없애기 위해 홍보해왔다. 현행 일본헌법은 그 골자를 사이러스 피크 교수가 작성한 것으로 서구적 이념의 소산이다. 피크 교수는 자신이 전쟁금지 조항을 삽입하도록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레이건은 할리우드 배우였을 뿐 아시아 문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레이건은 막강한 세계적 파워를 지닌 대통령으로, 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년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냐 마냐의 문제는 나이든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거리다.




정직이 통하지 않고 계속 핍박당한다면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단순히 교과서 왜곡이나 전쟁금지조항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패전 이후 집권한 일본 자민당은 개헌위원회를 만들어 일본 천황이 상징적 존재가 아닌 국가기관이 될 것을 제의해놓은 상태다.




이는 바로 과거의 전쟁 주동자들이 했던 짓이다. 그들은 천황을 국가기관으로 이용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천황이 국가문제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군부 인물들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 일왕이 권력주체로 나온다면 일본에 1930년대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내겐 ‘천황폐하’가 교토시내를 지나간다는 이유로 방문과 대문을 모두 걸어 잠가야 했던 기억이 있다. 1971년 자유시대에는 도쿄역 호텔에서 천황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일본은 어째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 일본은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덕분에 이제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세계 제2의 부국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인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고통을 들쑤시는가. 일본은 또다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는가.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 전쟁을 금지한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군부를 그 옛날처럼 파괴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법안에 서명하는 것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일본은 자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이 있어야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6]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이다.







[#7]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계?




1983년 2월 신문은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사진을 실어 보여주기 바빴다. 나는 수년간 한일 양국에서 생활하며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해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사진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카소네 총리의 얼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다케오 후쿠다 전 일본총리는 대중 앞에서 그의 조상이 15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 혈통임을 공표했다고 들었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가계 또한 후쿠다 전 총리처럼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이민 온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문화사를 공부하는 내가 들은 나카소네의 만찬 연설 중 핵심은 “6, 7세기 일본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과 문화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제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진 빚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들이(한국에) 진 문화적·기술적 빚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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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쿠폰 17-08-24 20:43
 
위에 이어서

문화적·기술적 빚이 6, 7세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이전인 5세기 전체, 부여족의 혈통으로 일본 천황자리가 채워졌던 시대까지 걸쳐 있다고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우호적인 말들이 새로 씌어질 일본 교과서에 반영됐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나카소네 총리의 조상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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