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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8-24 21:12
일본인도 모르는 진짜 일본 고대사 2
 글쓴이 : 공짜쿠폰
조회 : 589  

서기전 18년 백제 건국에서 6갑자, 즉 360년 이후를 보면 당시 부여 기마족의 이런 움직임과 대략 부합한다. 중국 한나라 멸망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 개편의 소요가 지속되던 때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진나라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부여족은 남하하면서 멸망한 낙랑족과 합류하며 세를 불렸을지 모른다.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역사’에 따를 것 같으면 중애천황은 362년 죽었다. 그의 통치 이후 신공왕후(오키나지 다라시 공주)의 섭정이 이어졌다. 신공은 한국에서 출생한 왕녀다. 신공과 그녀의 아들 오진왕(호무다 와게 또는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 왕자로도 불린다)의 출연은 일본의 역사서에서 그 연대가 정확히 두 갑자인 12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왜곡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그들에 따르면 신공이 가야(미마나)를 정복하고 이곳을 ‘일본(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69년에 가야에 기반을 둔 부여족이 바다 건너 규슈로 건너가 왜를 정벌했다.





부여족 선단의 항해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사실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역사서는 ‘신공왕후가 대구까지 올라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했으며 신라왕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모두 날조다. 왜는 한반도에 침입해 대구까지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일이 없다.





진무천황 = 이와레 왕자 = 오진천황





8세기 일본 사가들은 ‘구다라기(백제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부여족은 대구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했다. 그들은 만주의 본거지를 떠난 이래 계속 몽고말을 타고 이동했다. 부여는 남쪽에 퍼져 있던 마한 원주민을 제압하고 백제 지역에서 전리품을 얻어낸 뒤 낙동강 유역의 근거지나 부산으로 떠났다.





이러한 부여족의 정복활동 전체가 일본사서에는 ‘이와레 왕자의 야마토 동정(東征)’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레 왕자는 후일 진무(神武)천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이와레의 ‘이와’는 지금도 바위(岩)를 뜻하며 ‘레(余, 餘)’는 족속이란 의미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무천황이란 이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인 800년경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이와레, 즉 부여 바위왕자가 지나간 길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규슈에서 출발해 일본 내해를 따라 동쪽으로 400km 넘게 떨어진 나라의 야마토 평원으로 항해한 것이다. 지름길인 시고쿠섬의 남쪽 태평양 바다로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시 배의 성능상 내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이와레 왕자의 동정 속도는 느렸다. 곳곳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레 왕자의 동정은 4년, ‘고사기’에 따르면 16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의 부대는 오사카와 요도강에 상륙했지만 여기서 오랜 원주민(아마 야요이족일 것이다)의 저항을 받아 패했다.





이에 그들이 받드는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진군해온 것을 노여워해 패했다고 생각하고 이즈(紀伊)반도로 배를 돌려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부터 상륙했다. 후쿠오카현 동굴 고분벽화에 아마도 진무와 야다노 가라스(八咫烏)의 전설을 묘사한,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진무의 배를 인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때 이와레 왕자의 두 형제가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시련이 많아지만 마침내 그릇에 제물을 담아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와레 왕자도 토기를 직접 빚었다. 또다시 치른 전투가 패색이 짙어졌을 때 금빛 깃털이 달린 연(매를 말한다)이 이와레 왕자의 활에 내려앉아 적들을 눈부시게 만든 덕분에 이겼다. 오늘날 일본군부의 최고 휘장은 금빛 연 훈장이다.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磐餘(余)彦) 왕자, 즉 진무천황은 오진천황을 말한다.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오진천황의 활동을 진무라는 가상 인물에 갖다붙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레 왕자(오진천황)는 우네비산에 안장됐다. 지금도 매년 4월 초사흗날 왕실의 제관이 나와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제관들은 그 제사가 현재의 일본 천황가문이 큰 덕을 입은 외국인 정복자에게 올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첫 역사책에 그의 동정(東征)에 관한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된 반면,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아들 닌도쿠(仁德)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돼 있다. 닌도쿠왕은 가장 큰 능묘를 축조했다. 이 능묘는 경주고분의 것보다 크다. 일본에는 규모가 다른 2000여 기의 고분이 있는데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 북부의 후기 야요이 시대 무덤은 자그마하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고분은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이 대형 고분틀이 모두 오사카 나라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닌도쿠 왕릉 발굴이 금지된 이유





또한 이들 고분에는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돼 있다. 3세기 중국의 책 ‘위지’는 “왜에는 말이 없다”고 했으나 대형 고분에는 한국식 마구와 무기류가 부장돼 있었다. 부여족이 전투에 쓰던 말과 마구, 당시의 최신무기인 철제무기들로 보인다.





옛 천황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군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발굴이 금지된 상태다. 그런데 1872년 폭풍으로 닌도쿠 왕릉이 무너져 이를 복원할 때 내부를 본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須田龍作) 일본사 교수는 부장된 유물이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었다”고 했다. 일본 당국이 부여 기마족의 야마토 정벌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닌도쿠 왕릉을 발굴해야 한다.





부여족 혈통의 두 번째 왕이 되는 닌도쿠 천황(‘일본서기’에는 16대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은 능의 규모로 보아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듯하다. 그의 통치형식은 봉건제이지만 장관이나 봉건영주와 같은 4개의 우지(氏)가 있어 왕명은 모두 그들을 통해 전달됐다. 4명의 우지 중 3인은 부여 기마족 건국자 오진왕을 보좌하는 무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옛 야요이족 출신으로 무속의례를 주관하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이었다.





후일 모노노베 가문은 임금이 되는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무속과 대치될 불교가 왜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카도미 가문도 오래전 왜에 자리잡은 집안으로 여러 신에게 종교의례를 집전하며 사슴뿔을 갖고 점술을 행하였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일본 전역에서는 무속을 믿었지만 종교권력은 모두 세습되고 있어서 혈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사가들이 당대 주요 가문의 역사를 모두 신의 시대라는 고대와 연관시키고 조상을 모두 신으로 설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삼종신기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





일본 왕권의 상징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삼종신기(三種神器)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러한 전통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에 따른 것이다.





그중 하나인 동경(銅鏡)은 처음엔 중국에서 제작됐는데 이것은 신통력을 지닌 것이라 하여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채 사후세계를 위해 부장되었다. 동경의 번쩍이는 기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일반화한 태양숭배와 통했다. 6세기 초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조그맣고 둥근 금판도 태양을 뜻한다.





삼종신기의 둘째 물건인 칼은 왕권의 상징으로 일찍이 신라에서 이즈모로 이주한 한국인의 권세를 말해준다. 이 특별한 칼은 맹렬남 바람신 스사노오노가 머리 8개 달린 용을 쳐부수고 얻어냈다.





셋째 신기는 곡옥 또는 곡옥목걸이다. 곡옥은 일본에서 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는 연옥이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 고대에는 다른 신기보다 이 곡옥(일본에서 마가타마라고 부른다)이 진정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경주 고분에는 이런 곡옥이 수십 개씩 장식된 금관이 많이 부장됐다.





곡옥은 태아나 올챙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고기는 아시아 전체에서 부의 상징이다. 그 위에 한국 무속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전령으로 중요한 존재이며 벽사(?邪·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용으로 지니는 호랑이 발톱은 곡옥과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곡옥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그중에는 곰의 발톱도 있다. 단군은 웅녀(곰 토템 부족의 여인)의 아들이며 아이누족은 곰을 신으로 받든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지금도 곰 축제를 연다. 곡옥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발굴된다. 이 물건의 이동경로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 것이지 절대 그 반대방향으로 역류해온 것이 아니다.





‘고사기’, 특히 ‘일본서기’에선 왕가의 분열상을 감추려는 끊임없는 조작이 행해졌지만, 14대 중애대(代)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 중애 이전 13명의 왕들은 모두 야마토에 거주했다는데, 중애왕만은 규슈에서 살았던 것이다. 중애왕은 10척 장신이라는 식의 특징적인 묘사가 많다. 그는 마지막 야요이 종족인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중애왕비 신공왕후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의 왕녀 신공왕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은 신라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국 왕자 아마노 히코코의 딸이지만 가야에서 왔을 확률이 더 높다. 중애왕은 신공과 결혼했다. 그는 이미 두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새롭게 왕비가 된 신공은 매우 명석하고 영리했으며 얼굴은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워 아버지가 그를 매우 특별히 여겼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신공은 야심이 대단하고 수완도 비범한 한국 왕녀였던 듯하다. 그녀가 한국을 원정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정반대의 것일 수 있다. 그녀의 전설적인 행적은 369년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외국인 왕족 신공의 개인적 거사(擧事)인 이 원정이 일본사에는 이와레 왕자의 무공에 가려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사가들은 부여족의 일본 원정 중 일부를 따서 이 두 인물의 전설적인 무공으로 돌려놓은 듯하다.





한반도가 이들에게 점령당해 왜땅으로 편입되고 신라왕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남녀가 신무기를 들고 바다를 건너와 왜를 정복한 것이다. 또다시 ‘바위’가 저변에 드러난다. 신공은 중애왕의 아이인 태아(이와레 왕자, 즉 오진왕을 말한다)를 한국이 아닌 왜땅에서 낳으려고 자궁에 돌을 끼워 막아 출산을 지연시켰다. 부여족의 일본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왜땅에서 태어난 자주적 왕가라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한바탕 작전이 연출된 것이다. 이로부터 350년 뒤 일본사를 처음 편찬할 때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덮어버리기 위해 역사기록의 전후좌우를 뒤바꾼 것이다.





신성시되나 실권 없는 日王





5세기는 신라와 야마토 두 나라 모두 무당이자 제관인 지배자의 힘이 정점에 달했다. 527년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무속의 색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계속 무속이 힘을 발휘했다. 이 원시 민중종교, 신도는 9세기에 불교와 대치되는 종교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신도는 점차 일왕 숭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 반면, 한국 무속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처음에는 불교가, 나중에는 유교가 작용했지만 그것은 신비한 주술적 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군사권이 무속과 결부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또는 ‘신성한 천황’을 위해 싸우는 일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정책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고다이고(後醍歸) 천황조와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에 이러한 풍조는 극에 달했다.





일본 역사 초기의 무속신앙은 한국에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산신(山神)은 일본 무속신앙에 전적으로 흡수됐다. 즉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손자 니니기는 규슈에 하강하여 산신의 딸을 만나 사랑하면서 그녀가 그날 밤 잉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단군설화와도 비슷하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최태영이 쓴 ‘인간 단군을 찾아서’의 가야 지명연구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산신으로 소개된 고황산령신(高皇産靈尊)이 고령가야의 한국인이었다는 연구가 가야지명 연구자인 다카모도(高本政俊)와 최태영의 연구로 나와 있다).





성군이 나오면 받들지만 패륜 군주가 나오면 제거한다는 것이 중국의 천명 개념이다. 중국에서는 천명을 내세워 왕조를 바꾸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일본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그 대신 권력가문이 내세운 총리나 장군이 권력을 행사했으며 천황은 신성시되긴 했지만 실권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한적(漢籍)을 옆에 두고 이를 표절한 것이 분명하다. 한 예가 닌도쿠 천황은 거대한 묘 규모로 보아 일단의 강제노역을 동원한 왕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민가에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여 3년간 세금을 면제해준 매우 인자한 군주로 기술했다. 중국 사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닌도쿠왕대(代)에 부여 기마족이 들여온 오락거리, 매사냥이 유행했다.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쓰기도 했다. 경주 석빙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통해 비단과 무명을 비롯해 금, 은, 철, 한문책 등이 들어오고 교역량이 늘었다. 이때도 불교는 유입되지 않았다.





흔들리는 부여왕통





8세기 역사기술의 방편 중 하나는 유명 가문 우지(氏)의 조상을 일본 건국자 이와레 왕자의 원정에 동참한 신(神)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대표 우지는 가문 전체에 군림했다. 왕의 명령은 대표 우지나 장관을 통해 하부로 전달되고 농민과 장인이 여러 우지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살았다.





우지는 외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진나라에서 비단옷 재봉, 직조 같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온 장인들이 형성한 것으로, 외래 예술과 기술을 망라한 이런 전문 우지가 700여 개나 됐다. 노예도 있었다. 남부 규슈가 전쟁에 패하며 생겨난 구마소족 같은 전쟁포로나 동부 혼슈에 굴종한 에미시족이 그러했다.





우지들의 존재로 왕권은 일정 부분 제한됐지만 천황이 군부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면서 누가 천황이 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황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나 짓고 꽃밭이나 산책하고 제사나 지내고 빈둥거리면 그만이었다. 대신 국가의 정무는 민간 출신의 권력자가 집행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거나 천황가와 혼사를 맺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한국 출신 가문이 번성하여 부여 지배계급과 혼사를 맺었다. 이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딸을 왕위 상속할 만한 자들에게 비로 들여보내고는 뒤에서 조종 하여 사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후일 후지와라(藤原) 가문 같은 총리대신급 집안에서도 딸과 손녀를 줄줄이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일본의 왕권을 자기 뜻대로 조종했다.





5세기를 통틀어 왜국의 왕위는 부여 기마족의 후손이 차지했다. 닌도쿠왕의 비 바위 공주, 즉 이와노히메(磐之媛)는 가야 출신 가쓰라기 우지의 선조인 가쓰라기노 소츠의 딸이었고 그의 손녀딸 하에는 부여왕족 혈통의 두 임금 겐조(顯宗)와 닌켄(仁賢)의 어머니다. 겐조 왕대에는 경주 포석정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잔치를 벌인 것처럼 그도 닷새씩이나 연회를 계속하며 곡수연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부여왕통은 차츰 유약해지고 혈통과 파벌 간에 왕권 다툼이 생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26대 왕인 게이타이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변방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527년 북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岩井)의 난은 왕권교체에 반발하는 부여 기마족 후손들의 저항으로 보인다. 이즈음에 백제가 가야땅을 조금씩 먹어들어가고 있었으므로 부여 기마족의 한반도 내 지지기반도 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 뒤 532년에는 신라가 가야의 북부를, 이어서 562년 남부 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끝났다.





6세기 말에는 불교 도입을 놓고 가야출신 신진세력과 화족 사이에 큰 대립이 생겼다.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에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소가(蘇我)와 오래된 무속을 그대로 받들자는 모노노베 두 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여기에선 친불교파가 승리했다. 이후 50여 년간 한국인 후손 소가 가문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 딸들을 계속 왕비로 만들었던 만큼 일본 왕의 혈통에는 한국인 소가파의 피가 많이 스며들어 있다.





비단 직조술 전파한 하타 가문





점차 한국의 상류층이 전문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한 예로 300년경 백제에서는 가께쯔(眞毛津)라는 이름의 옷 만드는 여성을 보냈다. 그 후손들은 기누누이(衣縫· 비단 직조 공인)로 자리잡았다.





덧붙여 기록에는 265년 중국 진시황(또는 사마염)의 방계손 하나가 일본에 왔다고 한다. 그 궁월군이 처음에는 한국에 정착하여 120가구를 거느리고 살았다. 시국이 복잡해지자 그는 후손을 모두 거느리고 왜로 이주했다(‘일본서기’에는 처음 백제인 궁월군으로 기록됐다가 9세기에 나온 책 신찬성씨록에는 ‘진시황제 3세손 효무왕’으로 그 표현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뛰어난 비단 직조기술을 가지고 온 하타 우지는 부여 기마족의 통치 아래 번성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175년이 지난 후 하타 가문은 1만8670명으로 불어났다. 한국말을 하면서 살던 하타 사람들은 별도의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불교가 들어왔을 때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600년경 이 집안의 우두머리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라는 사람이었다. 왜국과 한국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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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chim 17-08-25 18:51
 
정말 재밌고 유익한 글이군요.

왜 방사능 원숭이들이 그리 신사니 뭐니하면서 각종 개잡신을 만들어 섬기는지 이유가 여기 나와있네요.

처음부터 문명을 열어준게 한국에서 넘어간 무당이라니.

최순실을 비롯해 무당파워가 장난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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