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는 어떤 신(神)인가
1)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라 많은 신(神)들 중 단지 이스라엘민족의 신일 뿐이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 1:26]
+ 주 하느님이 가라사대, “보라, 그가 (아담의 타락을 지적) 이제 우리들 가운데 하나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창세 3:22]
+ 야훼여, 神들 중에 당신같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출애굽 15:11]+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여 만군의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 할 것입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애굽 20:2-3]
+ 너희는 그들의 神들 앞에 엎드려 그들을 섬기지 말며 ........... [출애굽 23:24]
+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네가 몸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창세 17:7~8]
+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도 섬겼고 에집트에서도 섬겼던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 있는 남의 나라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 야훼께 마음을 바치시오.”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다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 야훼를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그 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규정과 법을 주었다. [여호수아 24장] ---> 남의 나라 신(神)들과 이스라엘신(神)의 대등한 대조를 보면 여호와의 신계(神界)에서의 지위는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신일 뿐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의 백성이 내 앞에서 축제를 올리도록 광야로 내 보내라[출애굽 5:1-2]
+ 파라오는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손을 들어 에집트를 호되게 쳐서 나의 군대,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에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리라[출애굽 7:4]
+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이런 일을 당해야 했습니까? [판관 21:3]
+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을 따라가면 안된다. 너희 하느님께서 화를 내시어 너희를 땅 위에서 쓸어 버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계시는 너희 하느님 야훼는 질투하는 신이시다.[신명 6:14-15]
+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넘겨 주는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을 가엽게 보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아라.[신명 7:16]
+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출애굽 12:12]
☞『Bible』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는 유일신이 아니라 여러 민족신들 중에서 ‘유대민족의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신이 이스라엘에 관심을 쏟을 때 또 다른 나라에는 그네들의 민족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신이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민족이 다른 나라 신을 따라 가면 여호와신이 질투한다지 않는가? 그리고 여호와신이 관심을 가지는 건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뿐이다. 다른 민족을 조금이라도 챙기는 장면이 있는가? 전혀 없다. 오히려 죽여야 할 대상, 전멸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다른 민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여호와는 세계신이 아니라 민족신임을 확연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일신’의 잘못된 교리를 고집하는 것은 창조주(一)와 피조물(多)이라는 ‘이원론’으로 우주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일(一)과 다(多)의 둘 중에서 ‘일’(一)만을 강조한 것이며, 하늘(一)과 땅(多) 중에서 하늘만 높인 결과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차이를 확연히 알아야 풀리는 문제이다.
▣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우리는 여기에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가 생겨 나온 토양이 다른 까닭에 서로 다른 신관,우주관,인간관,자연관,역사관,남녀평등에 대한 인식 등이 생겨 나오기 때문이다.
유목문화에서는 필연적으로 “하늘의 숭배”가 발달되고 농경문화에서는 “땅의 숭배”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모든 고대 문화에 있어서 하늘은 남성이고 땅은 여성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충분히 거론된 것이고 땅에 해당되는 독일어 에르데(Erde)도 불어 떼르(Terre)도 여성이다. 서양문명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이루는 유목문화에서는 여자의 위치는 매우 빈약하고 대접 못받는 예속적이고 소외된 존재다. 그러나 농경문화에서의 여자의 위치는 그들이 유목문화에서처럼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예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직접 생산수단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노동이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 존재의 독립적 기반을 갖는다. 『브리태니커』에 “여자”라는 글을 기고한 비올라 클라인(Viola Klein, Senior Lecturer in Sociology, University of Reading, England)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최근까지의 매우 발달된 학문적 성과의 풍부한 정보를 동원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수렵유목이나 초원유목을 하는 민족의 사회에 있어서는 여자의 위치는 대부분 비천한데 반하여 농경에 생활의 기반을 둔 옛사회일수록 여자의 위치는 대체로 고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농경사회에 있어서는 여자는 인간 생명의 창조자로서 간주될 뿐 아니라, 음식의 제공자로서, 또 남자의 반려로서, 또 생산성의 상징으로서 간주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여자는 높은 특권을 누렸으며 때때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항상 무제한적이며 광막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은 어디서 보든지 그 모습이 같다. 서울에서 보는 땅과 목포에서 보는 땅과 부산에서 보는 땅은 모든 다른 땅들(many)이지만, 하늘은 서울에서 보든지 목포에서 보든지 부산에서 보든지 다 동일한 것(one)이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하늘은 일(一)을 상징하고 땅은 다(多)를 상징한다. 하늘은 추상성․보편성․절대성의 상징이고 땅은 구체성․국부성․상대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하늘의 숭배는 유일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universalization) 반하여, 땅의 숭배는 그 숭배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국부화될(localization) 수밖에 없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는 땅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항상 이동을 하기 때문에 정착된 땅에 자기들의 존재의 근원을 삼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막에 있어서는 이동을 할 때에도 여행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하늘이지 땅이 아니다.
유목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들 삶의 양식을 제공하고 있는 자연대상은 동물(양떼)이고,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대상은 주로 식물(벼․보리․감자․채소 등)이 된다. 유목의 대상이 되는 양떼는 항상 일정한 곳에 있지 않으며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牧者, shepherd)의 명령이다. 경험있고 현명한 한 사람에게의 다수의 무조건의 복종이 그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 에라가 적은 것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심리를 소위 명령심리(command-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러한 심리는 유목과 유사한 이동집단에서도 공통된 것이다. 산악등반대의 캡틴이나 배의 선장에게도 무조건적인 복종이 요구된다. 매우 비민주적이고 종적인 상하굴종관계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캡틴이 실수하면 최악의 경우 다같이 죽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에라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하나님이나 주예수는 이러한 유목민족의 매우 비민주적 명령심리를 투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목사(paster)라는 말자체가 “양떼지기”라는 뜻이다. 영어의 패스터(paster)는 원래 “초원에서 먹이는 자”란 어원을 갖고 있다. 목사(牧師)의 師는 스승사 자가 아니다. 師는 지금 우리가 군대용어로 사단(師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문의 원뜻은 군대의 단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민족의 농부와 식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심리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식물은 자기가 뿌리박고 있는 땅의 自然(스스로 그러함)의 논리에 의하여 성장할 뿐이며, 간섭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휘모는 논리를 거부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농경민족은 항상 늑대나 이리, 그리고 가뭄의 사망의 골짜기에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민족의 행태와는 다른 행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처럼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부정의 논리(logic of negation)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욱 발달되어 있는 것은 화해의 논리이며 공존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적”“원수”“죄악”“사망” 등의 『성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러한 극렬한 어휘가 우리 고전(古典)에는 매우 적다. 농사를 짓는 지혜는 대부분의 농부들이 골고루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한명의 장로(長老)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민주적 협동이며, 지혜로운 한사람에게로의 다수의 복속이 아니다.
목동은 양떼를 간섭하고 명령하고 인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시로 이리떼들로부터 막아야 하고 항상 그들이 길잃은 양이 되지 않도록 염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농부와 식물의 관계는 정확하게 그 반대이다. 인위적으로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되고 간섭하지 말아야 되고 인도하지 말아야 한다. 식물이 스스로 그러한(自然) 자기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양떼도 없고 따라서 양떼를 지켜주는 목자도 필요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는 결코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둘이 있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은 이미 야훼자신이 자기의 유일성(하나인 님)을 거부하고 있다. 즉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이미 존재론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일성이란 남을 윽박지르고 후두려 패는 배타성일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같이, 노경이 간신히 얻은 아들 하나를 태워 죽여 피를 보기까지 해서 그 복종을 시험하고 강요하는(아브라함-이삭의 경우) 그러한 야훼하나님, 사랑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을 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협박의 하나님”[God of intimidation]은 내 말이 아닌 신학용어임) 그러한 하나님은, 마피아의 두목보다도 더 무서운 깡패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깡패하나님”은 이스라엘인에게 너무도 정답고 친숙하고 또 든든하게 느껴지는, 즉 그들의 몸에 배어있는 유목기질(nomadic temperament)에 너무도 적합한 신앙대상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고요한 새벽의 나라 조선에 조용히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다.
▣ 그 종족(種族)의 지리학(地理學)이 신의 이미지를 빚는다.
사막에서 보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나이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글에는 지평선이 있기는 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다. 유일신 관념이 생길 리 없다. 사람들은 신에 관한 관념을 세상으로 투사하게 된다. 즉